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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Sep 19. 2022

觀 - 생각에서 떠오르기

행복한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10) 2-2


지난 시간에는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가장 흔한 형태인 감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감정은 구름처럼 왔다가 갈 뿐, 나의 정체성과는 다른 것이지만 잠깐 정신줄을 놓으면 쉽게 끌려가는 일이 많아서 제일 먼저 확인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나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생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2. 관조하기 觀 - 나의 생각에서 떠오르기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친 것도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여기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라는 말 자체가 생각은 내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주체고 생각은 내가 가진 객체입니다. 취할 수도 있고 그대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것이 생각입니다. 내가 호주머니에 지갑을 넣어 두었다고 해서 나 자신과 지갑을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으면 마치 그 생각과 내가 동일시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생각과 나의 동일시, 대상과 주체가 한 떡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그 후에는 그 대상에게 끌려 다니게 됩니다. 물론 생각은 지갑이나 장난감처럼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자들도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오래된 습관에 쉽게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이 어떤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는지 그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생각은 우리 집 강아지 같은 것


산책을 하다가 덩치가 큰 골든 리트리버를 산책시키는 체격이 작은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주인이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가 주인을 끌고 다니는 셈이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개가 덩치가 너무 크고 힘이 셌던 것이죠. 만일 건장하고 힘이 센 사람이 그 개의 목줄을 쥐고 있다면 개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개와 함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도 이 골든 리트리버와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이 리트리버 보다 훨씬 사나울 때가 많고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근육이 약하면 그 생각에 그저 끌려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하고 높은 시선을 가지면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CEO가 체력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피트니스 클럽에서 팔과 다리의 근육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나의 실체와 내 생각은 너무나 오래 붙어 다녔기 때문에 이 익숙한 나의 그 관념이나 생각에서 단번에 떨어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몸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을 단련해야만 합니다.



생각은 부정적인 말만 하는 얄미운 친구


생각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 오릅니다. 나의 생각이긴 하지만 나를 평온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태평하냐?'

'저 사람이 널 쳐다보는 눈초리를 봐. 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너 뭐 잘못한 거 없어?'

'야! 너는 뭐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냐?'

'이렇게 살면 뭐하냐?'


우리는 혼잣말로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들을 하는 걸까요?


분명한 것은 이런 식으로 내 속에서 올라오는 속삭임, 지껄임 들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서 용기를 빼앗아 가고 나의 의식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전형적인 에너지 도둑입니다.



이런 말을 수십 년 간 귓전에서 계속 지껄이는 친구가 있다면 단 몇 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서너 번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손절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친구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마음대로 이 친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친구에게 에고(Ego)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면 아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참 나'를 괴롭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인 셈이죠.


약간 삐딱하고 부정적인 오래된 내 친구!


미래를 바라보며 걱정을 부풀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를 과장하는 불안하고 부정적인 내 속의 이 친구에게 오늘도 얘기합니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또 너냐? 이제까지 네가 한 말 중에 맞는 말이 도대체 몇 개나 되냐? 며칠 전에도 직장에서 내가 실수했다고 그렇게 죽을 것처럼 괴로운 생각이 하루 종일 내 속에서 떠들었지? 어때? 며칠 지나니까 그게 죽을 일이냐? 오히려 실수를 통해 배우고 내가 한 단계 더 성장했잖아. 어째 너는 네 말에 책임도 않지고 허구한 날 그렇게 부정적인 말을 쏟아 놓냐?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렇습니다. 오래된 이 친구는 어릴 때 불안한 가정에서, 불안한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 하루 종일 부정적이고 불안에 젖어 떠듭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사라지면 자기가 했던 말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자기 말이 맞지 않았다고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느새 나타나서 또 비슷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정말 얄밉고 무책임한 녀석이죠.


저는 이 친구의 부정적인 말투에 아주 질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죠.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생기면 또 찾아와 떠들긴 합니다. 이젠 이 친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기에 '또 왔어? 이제 그만 좀 하지?'라고 하면 그 친구 목소리가 좀 줄어들긴 합니다.



이 부정적인 내 생각의 목소리를 뇌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부정 편향성'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인 판단을 더 먼저 하고 더 많이 하는 편이 수백만 년 동안 거칠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유용한 전략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랑이와 기근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사회에 살면서도 여전히 이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문의 사회면은 언제나 부정적인 뉴스와 살인사건 등이 맨 앞면을 차지하고 있죠. 그래야 신문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생각은 내 안의 원시인


서울대학교 배철현 교수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을 보면 최초의 '호모'라는 지위를 획득한 유인원은 260만 년 전의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입니다. 그 이전에는 작은 원숭이라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불렸죠. 두 발로 걸으며 타제석기와 같은 도구를 사용한 것이 다른 동물과 구별된 인류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도구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인류의 속성이라고 본 것이죠.


인류가 불을 이용하여 다른 동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뇌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을 약 백만 년 전으로 봅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하여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만들었고 불을 사용함으로써 더 이상 자연에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도에 따라 자연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에 익힌 음식들을 통해 고효율의 에너지를 섭취하면서 뇌의 구조와 턱의 모양이 바뀌면서 인류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에서 농경을 시작하면서 집단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된 것은 불과 만 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추위와 더위, 배고픔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만 해도 5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넉넉하게 보아서 인류의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것을 만 년이라고 본다면 자연의 일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지구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낼 수는 없었습니다.


인류가 살아온 99%의 기간 동안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 맹수와 자연재해 앞에서 돌도끼를 하나 들고 있는 한낱 연약한 작은 원시인에 불과했죠.


이 원시인의 입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오고 갈까요? 다른 모든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어디서 맹수가 나타날까?', '어떻게 하면 오늘도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까?', '점점 추워지는데 따뜻한 곳은 없을까?' 하면서 불안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매머드와 같이 큰 사냥감을 잡아먹을 것이 넉넉하고 무리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벽에다 그림도 그리고 춤도 추었을 것입니다. 별빛을 보면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겠죠.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생존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게 머릿속을 지배하는 강력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뇌리와 DNA에는 원시인들의 이런 생존에 대한 강한 집착이 코딩되어 있습니다.


이 원시인이 생존에 대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우리가 불안해하는 생각의 뿌리에 있습니다. 이 원시인의 생각은 마치 생존 기계와 같이 반사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인류의 자율신경계는 생존을 위해 우리 속에 있는 이 원시인의 느낌과 생각에 따라 순간적으로 잽싸게 움직입니다. 자신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인 줄 알고 심장이 빨리 뛰고 팔과 다리의 근육에 대량으로 혈액을 보내며 눈동자는 커지고 소화는 억제됩니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맞서 싸울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 결정하라고 나에게 소리칩니다.


야생에서는 수풀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그 소리의 주인공이 나를 잡아먹을 호랑이인지, 내가 잡아먹을 토끼인지 예민하게 알아채야 합니다. 내가 그 소리의 주인공에게 오늘 점심 거리가 될지, 그 소리의 주인공이 나의 점심 거리가 될 것인지 알아맞히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입니다. 내기치 고는 판돈이 자신의 목숨이다 보니 불안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담력이 큰 타짜라도 손모가지는 걸지 몰라도 자기 모가지를 걸고 도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빨리 도망치는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것이고 그런 유전자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자극에도 불안을 느끼는 것이 생존에는 유리할 수밖에 없는 뿌리 깊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인류에게는 이런 야생의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훨씬 위험합니다.


야생에서 살아야 했던 원시인류 중 남성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타격을 입어 죽을 확률이 3%에서 20% 정도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지구에서 가장 타살률이 낮은 곳이며 10만 명 당 1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자살률은 10만 명당 40명 정도입니다. 물론, 자살률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보다 몇 배 높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결국 타인보다 자신의 손에 죽을 확률이 40배나 높은 셈입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바로 그 목소리,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생존을 위해 허둥대다가 사고를 치는 그 원시인의 목소리가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보다 위험한 내 생각


나의 실체와 나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지 한 영성가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적인 영성가로 꼽히는 에크하르트 톨레가 청년시절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할 마음을 먹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기도 하고 자기가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이 녀석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군! I cannot live with myself!” 그렇게 한 마디를 내뱉고 나자 에크하르트 톨레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만, 내가 둘인가?”, “주체로써 판단하는 나(I)는 누구이며 늘 말썽을 부리는 나(myself)는 누구지?”, “대체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이 물음이 그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습니다.


그 후로 에크하르트 톨레는 불교의 수행법과 명상을 통해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생각이나 몸에 국한되어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 생각은 잠시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뿐이며 자신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한한 에너지와 연결된 존재라고 깨닫습니다. 그는 지금 개별적 종교를 초월한 영성에 관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펴내고 강연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참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생각 중독자들!


이렇듯 나의 생각은 나의 실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생각에 쉽게 끌려가기 마련입니다. 생각은 그 자체를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부정적인 생각은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 올라옵니다. 이런 생각이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마음이 들지만 도대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 삶에 해가 될 뿐임을 알지만 내 의지로 멈출 수가 없는 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치명적인 중독은 생각 중독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고 한 번 사로잡히면 마음대로 벗어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좀 연습이 필요하고 먼저 깨달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나 책을 통해 좋은 영성가들을 만날 수 있고 유튜브의 도움만으로도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은 "아이 앰 TV", "써니즈",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라는 채널입니다.


매일같이 별 도움도 되지 않는데도 쉼 없이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 나를 끌고 이 감정, 저 감정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려 하는 나의 생각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관찰자가 바로 나입니다. 생각도 그대로 흘러가게 두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그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생각을 빼 버린다면 나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그만큼 생각은 나의 정체성을 차지하는 큰 부분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감정과 마친가지로 내가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고 자기 스스로 살아가려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별히 문제와 고통, 갈등이 있을 때마다 더욱 기세 등등해져서 나를 지배하고 끌고 다니려 합니다.


생각에서 떠올라 그 생각이 떠들어대는 광경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조금씩 그 불안한 원시인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도 하고 제 풀에 지쳐서 조금 떠들다가 시무룩해져서 그치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내가 나라고 가장 결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그 불안한 목소리 밑에 깔려 있는 내면의 욕구를 알아채는 지혜를 기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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