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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Sep 26. 2022

觀 - 몸에서 떠오르기

행복한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11) 2-3





2-3. 관조하기 觀 - 나의 몸에서 떠오르기



나는 내 몸이 아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최소한 기억이 있는 한 나는 내 몸과 나 자신을 한 번도 분리한 적이 없습니다. 철석같이 내 몸은 나이고 내 몸 밖의 모든 것들은 남이거나 환경이라고 여겨왔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영성에 관해 호기심을 기울이면서부터 너무도 당연했던 내 몸과 나의 동일시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 몸은 나인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지금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여전히 신뢰하고 따르지만 종교적인 교리나 전통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류의 구원 내지는 궁극적 행복이 특정 종교나 특정한 교리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저의 내면의 모습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경과학, 뇌과학을 현장에서 가장 생생하게 접하는 직업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내면에 대한 성찰을 뇌의 특성과 연관하여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뇌는 수백만 년에 걸쳐 특별하게 진화해 왔고 사피엔스가 다른 종과는 독특한 생활을 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장기입니다. 뇌는 약 1.5kg 정도로 60kg 성인을 가정하면 체중의 약 2.5%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몸 전체의 혈액 중 15%, 산소는 20% 정도를 소모합니다. 한마디로 에너지를 엄청 많이 쓰는 비효율적인(?) 기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의 뇌는 귀찮은 것을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뇌의 몇 가지 특성들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몇 가지 더 특별한 속성이 있습니다만 그 얘기만 하더라도 글이 너무 길어지고 주제에서 벗어날 것 같아서 한 가지만 뽑아 보았습니다.)



익숙한 것은 당연한 것?



뇌는 인지적 노력을 아끼기 위해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은 주목하지 않게 됩니다. 대체로 변화값에 민감한 것이 뇌의 작동 패턴입니다. 용돈을 처음 받을 때의 기쁨은 몇 개월간 반복되면 당연한 것이 됩니다. 회사에서도 새로운 복지혜택을 채택했을 때 처음에는 직원들이 열렬히 환영하지만 경기가 나빠져 복지혜택을 줄이게 되면 CEO는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당연한 것을 뺏아가는 악당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고객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직원을 인정하고 격려하지 않는 CEO도 있습니다.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일정하게, 꾸준하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일에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조직 내에서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에 감사하고 그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면 기초부터 무너지는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그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은 사람은 도인에 가깝습니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직원을 만나는 것은 천운에 가깝고 CEO가 그런 사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CEO 본인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직원들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것은 단일 실패점을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하늘을 우러러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뇌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런지 나는 내 몸과 나를 동의어처럼 사용해 왔습니다.


나는 내 몸과 함께 지낸 지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의식이 있는 한 내 몸을 떠나본 적이 없죠. 너무도 익숙하니까 당연히 내 몸이 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세포들이 나인가?


내 몸은 모두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내 몸의 세포들이 나일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내 몸에 붙어 있던 세포들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을까요?







심장세포와 뇌세포들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태어날 때 내 몸에 있던 세포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 정도 살아있다가 죽어가고 다른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됩니다. 그러니 내 몸에 있는 세포들은 벌써 수 차례, 수 백 차례 교체되었을 것입니다. 세포들이 대부분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일정하게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을 해서 다른 사람의 심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뇌수술을 통해 상당한 양의 뇌세포들을 덜어낸 사람도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몸의 구성요소들이 이렇게 대폭 교체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최소한 나의 세포와 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의 경계는 내 피부일까?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입니다.



과연 나의 경계는 어디인가?


아주 익숙한 나의 경계는 내 피부입니다.


내 피부의 안쪽은 나이고 바깥쪽은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몸속에는 나의 세포수에 두 배 정도 되는 100조 개의 미생물들이 있습니다. 금방 먹은 음식물도 있고 곧 배출되기를 기다리는 배설물들도 있죠. 이런 것들은 나라고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니 내 피부가 내 경계라는 생각은 생물학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라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시 살펴봅시다.


내 피부 바깥은 내가 아닌가?



아내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는 나도 속이 쓰리고 무언가 무겁게 내 몸을 가라앉게 하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아들이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아빠, 뭐해?" 라면서 안부인사를 하면 내 마음도 밝아집니다.


딸아이가 열이 나고 배가 아파서 힘들어하면 나도 마음이 아프고 몸에서 뭔가 불편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우리 집 강아지 모찌가 바닷가에서 목줄을 풀어주니 혀를 내밀고 환한 표정으로 사방을 뛰어다닙니다. 강아지가 뛰는 모습을 보며 저도 해방감과 자유를 느낍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나의 일부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을 나의 몸 전체와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어느 한 부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내 피부 경계 안의 어떤 세포들보다 더욱 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물건들도 때로는 나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끼던 물건이 없어지면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아프고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늘 환자분들과 함께 사니까 아파서 저를 필요로 하는 환자분들도 나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환자분들을 치료할 때 늘 쓰는 주사기나 초음파 기계도 나와 환자분들을 연결하는 나의 일부 같습니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장대나 카레이서의 자동차를 그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부처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뇌를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장치(fMRI)로 촬영해 보면 손에 해당하는 부위가 굉장히 길게 뻗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대가 손에 해당하는 뇌의 감각 및 운동영역에서 자신의 손이 길게 늘어난 것처럼 뇌가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카레이서의 뇌를 촬영해 보면 어깨에 해당하는 부위가 굉장히 넓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코너링을 할 때 자동차의 사이드미러를 마치 자신의 어깨처럼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뇌는 자신의 피부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뇌 안에 그렇게 연결된 대상에 해당하는 영역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장대나 카레이서의 자동차 사이드 미러처럼 우리 뇌 속에는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대상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내가 아닐까요?


내가 쓰는 물 잔이나 컴퓨터, 화분이나 심지어는 가로수도 비록 확률적인 밀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완전히 내가 아니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공기와 물조차 나의 일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 속으로 들어가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었던 공기가 숨을 내쉬고 나니 내 몸 바깥에 있습니다. 내 몸의 바깥에 있는 저 공기가 완전히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다시 내 몸속으로 저 공기분자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리는 저 빗방울은 먼 옛날 언젠가 내 몸속에 있었던 분자 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 중에서 100%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우리 이웃이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궁극적으로는 창백한 푸른 점과 같은 이 행성 위에 있는 모든 자연과 사람들은 비록 내 피부 안쪽에 있는 세포들보다 밀도는 낮지만 전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이저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에 카메라를 돌려서 지구를 찍은 모습을 보게 한 칼 세이건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더 확장하면 태양도, 태양계 너머에 있는 은하들과 암흑물질 조차도 다 알지는 못하기에 비록 확률분포의 밀도는 낮겠지만 완전히 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모두 한 점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주에 흩어진 많은 물질과 에너지들은 우리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빅뱅 대신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기원이 같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의 경계는 내 피부를 기준으로 확률적 밀도가 낮아지기는 하지만 더 멀리 뻗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뇌 속에는 가족과 이웃, 환자들과 직원들 뿐 아니라 늘 밟으며 지나다니는 수성못의 흙과 낙엽들, 앞산의 알싸한 공기와 시냇물 까지도 일정 부분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와 남의 경계는?



내 피부의 안쪽만 라고 생각하고()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은 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좁고 옹색할까요?


내 두개골 안의 그 조그만 뇌 속에 온통 나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정말 나는 행복할까요?


내 피부의 안쪽만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에만 집착한다면 내 피부 너머에 있는 수많은 자연의 에너지와 사람들의 의식적 에너지가 나의 행복을 빌어줄까요?


나의 경계에 대한 생각이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나의 경계가 내 피부 너머로 뻗어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넓어지고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환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 자신이 환자들 안으로 녹아들어 가고 자연과 함께 있을 때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의 호흡을 함께 느끼고 흘러가게 됩니다.


내 몸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지, 나의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이 하찮거나 보잘것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깨달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몸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몸의 요구를 아무리 채운다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가 다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대체로 몸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몸이 활기에 차 있고, 숙면을 취했다면 의식은 더한층 맑고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몸을 잘 가꾸고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의식의 진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몸을 힘들게 만들면서 더 높은 의식의 세계나 영성을 구하는 것은 예전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종교적 전통이지만, 저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에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몸은 수행을 위한 좋은 도구이고 영성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핵심 연결고리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몸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수행에서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올림픽 선수들처럼 최강의 체력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몸을 돌보고 적당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물론, 몸이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수행자의 삶이 훼손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나티코는 20대 중반에 한참 잘 나가던 기업의 최연소 임원의 자리를 내려놓고 태국으로 건너가 하루 한 끼의 식사와 최소한의 담백한 생활을 17년간 이어가며 숲 속에서 수행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뒤 사회에 복귀하여 대중들에게 쉬운 말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루게릭이라는 고통스러운 큰 병으로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해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평화롭게 마지막 숨을 거두며 또 다른 모험을 떠나는 아이처럼 그렇게 그는 떠나갔습니다.


근심을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 있습니다. 나티코가 스승에게 배운 마법의 주문이지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근심과 고통은 내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는데서 시작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제 삶의 큰 진보를 이루게 한 일들은 모두 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것도,

아내를 만난 것도,

멘토를 만난 것도,

의사가 된 것도,

이런 형태의 병원을 하게 된 것도,

의식의 진보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모두 내가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의사가 되기 까지, 그 후에 수련을 하고 개원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웠던 많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 모두가 저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꼈던 것은 그 당시 나를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고 당장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몰랐기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축복이 따로 있고 저주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고 지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때 현실은 저주스럽습니다. 나는 다 알 수 없고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 그 순간이 새로운 길을 여는 축복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신의 선물이자, 바로 신의 현존이라고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에 저항하는 것이 신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먼 길을 가거나 고행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내 앞에 닥친 현재가 바로 신의 현존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 고요히 자신을 내려놓는 것처럼 현재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저의 수행의 일부입니다.


지금도 매번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10번 중에 3번만 잘 되더라도 3할 타자인 셈입니다. 10번 중에 2번 되던 것이 한 번만 더 잘 되어도 형편없는 타자에서 수준급 타자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투수가 10번 공을 던질 때 10번 다 안타를 치겠다는 것은 만화에나 나오는 일이죠. 10번 중에 1번은 더 쳐내겠다는 마음으로 시련이 다가오면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이 합니다.


누군가는 그 불편함을 환영하라고 합니다. 아직 저는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 안에 머무를 때, 당장 코 앞에서 불편한 것만 따질 때는 속상한 일이 순간순간 생기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몸 하나를 위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창백한 푸른 점과 같은 행성과 우주의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이해할 때 언제나 "될 일은 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나의 경계가 내 피부를 넘어 뻗어 있고 그 끝이 우주의 기원, 영성, 내 인지 너머의 세계와 이어져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 저에게는 나에게서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나에게서 떠오른 CEO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비즈니스의 방향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한 주, 평화롭고 풍성한 나날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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