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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Oct 11. 2022

觀 - 에고 바꾸기

행복한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12) 2-4

행복한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12)

2-4. 관조하기 觀 - 에고 바꾸기


나는 무엇인가?


내 몸도, 감정도, 생각도 나의 본질이 아니라고 할 때 나는 과연 무엇일까요?


내 몸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 또는 내 몸을 일정기간 유지하고 관리하는 관리자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몸 어디엔가 유효기간이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유효기간이 끝나면 나는 내 몸을 떠나 원래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겠지요.


신을 믿는 분들은 신이 준비해 둔 세계로...


그렇지 않은 분들은 다시 지구의 일부로 돌아가겠지요.


나의 경계가 내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무한히 확장됩니다.


나의 가족과 직장 동료들은 물론이고 이웃과 공동체 사회, 이 행성의 모든 자연과 우주의 환경까지 모두 나의 일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물어본 일이 없지만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위의 말씀이 어쩌면 다음과 같은 말을 전제로 한 것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이웃이 네 몸의 일부인 줄 알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의식의 진보에 따른 에고의 변화


나의 일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위대한 성자가 어리석은 중생들을 계도하려는 명령이 아니고, 우주의 근본 원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의 감정이 내가 아니니 어떤 감정도 붙잡으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몸이 내가 아니니 내 몸에만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생각이 내가 아니니 내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나의 감정, 몸, 생각에서 떠올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자의 시선이고 자아가 확장된 CEO의 일입니다.


나의 감정, 몸, 생각은 나에게 속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나의 전체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나의 생각은 몸의 느낌을 좌우하기도 하기에 깨어남 이전에는 나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전체성과 나의 생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편의상 나의 전체성을 '참 나'라고 하고 나의 생각을 '에고'라고 부르겠습니다.


'참 나'의 의식 수준에 따라 에고는 다양한 모습을 보입니다.


'참 나'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에고의 모습



나의 에고는 원시인?


깨어남 이전에는 '참 나'의 존재가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각이 곧 나의 본질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죠. 이렇듯 '참 나'가 잠재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때 에고는 마치 원시인과 같습니다.



오로지 불안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맹수가 어디 없는지 늘 살피느라 초조한 모습입니다. 마치 생존기계 같은 모습이죠. 조금만 불안해도 움츠리고 경계하며 온 세상이 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며 언제 수풀 뒤에서 늑대가 나타날지 몰라 조마조마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세대가 부모님 세대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수준입니다. "너 그렇게 해서 나중에 어떻게 먹고살래?", "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니?"라는 등의 말은 모두 이런 의식 수준에서 나온 에고의 불안감의 반영입니다. 내 속의 원시인이 생존의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동안 나는 그저 생존경쟁 중에 잠깐씩 찾아오는 순간적인 포만감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죠. 그런 행복은 커다란 짐승을 사냥한 후에 며칠간 배부르게 먹는 동안만 지속됩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은 허기지고 불안하며 두리번거리면서 살아가는 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에고는 겁 많은 병아리?


깨어남 이전에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사피엔스는 태어난 직후에는 자아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만 2세 전후로 언어를 익히고 자신의 욕구가 때로는 좌절되면서 세상과 자신이 분리가 되죠. 그 전에는 양육자가 자기 자신과 구분되지 않으니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곧 아기의 전체 세계인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느낌이 얼마나 그 아이의 존재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극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무자비하게 인구를 늘리기 위해 강압적으로 아기를 낳게 하고 그 아기들을 집단적으로 모아 놓고 키우던 때였습니다. 아기들이 면역이 약한 상태에서 자주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 질환에 걸리니까 차우셰스쿠는 아기를 돌보는 어른들이 아기를 접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아기들을 아무도 안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차우체스쿠는 얼마 뒤에 실각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이 아이들 중 상당수가 세 살 무렵에 유럽과 북미 대륙의 가정들로 입양되었습니다. 10년 정도 후에 조사를 해 보니 이 아이들은 그 어떤 집단과 비교해도 충격적일 정도로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반려동물을 처참한 모습으로 죽이거나 심지어 입양한 부모들을 죽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세 살 때까지 아무도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은 것의 결과입니다.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는 거의 인간성이 결여된 상태라고 봅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타인의 감정에 전혀 무감각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따스한 사랑과 정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불안과 적들 투성이의 냉혹한 현실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어릴 때 아이들에게 친밀한 접촉을 많이 하는 나라죠. 친밀한 접촉을 통해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양육자에게도 아이에게도 포근한 연대감을 줍니다. 옥시토신이 마구 분출될 때 우리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고 따뜻한 곳이라고 느끼죠. 그렇지만 어릴 때 그렇게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한국의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10살이 채 되기 전에 불안에 휩싸여서 이 입시지옥, 생존경쟁의 시대에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서 살아남게 할까 조마조마하며 고민하기 시작하죠. 세 살이 넘어서 조금씩 자아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 불안감은 그대로 전염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조차 부모의 말을 듣고 친구들 아파트의 평수를 물어보고 친구들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모들의 세상에는 돈으로, 아이들의 세상에는 성적을 기준으로 모두 다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개념이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의식이 자리 잡게 되면 부모와 아이들의 에고는 겁 많은 병아리 가 됩니다.



성적만 떨어져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도토리가 머리 위에 떨어졌는데 그걸 모르는 작은 병아리가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면서 온 동네를 질주하죠. 그러면 다른 동물들은 사실 관계는 확인도 하지 않고 우르르 쫓아갑니다. 아이들의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도 무너집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다가도 엄마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 자신의 하늘인 엄마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초라한 성적표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죄책감과 수치심이 함께 일어납니다. 성적표에 숫자가 좀 더 적은 것은 그저 기호일 뿐 아이의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질 않습니다. 그 성적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태도가 아이의 삶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숫자 자체는 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엄마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몇 차례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에게도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고, 자기 속에 자리 잡은 겁 많은 병아리가 외치는 소리를 늘 듣게 되죠. '이젠 넌 끝이야. 도대체 맨날 이게 뭐냐!"라는 그 겁 많은 병아리의 목소리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 줄 착각하게 되죠.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그 목소리의 비난에 더 견디지 못하고 자기는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 나'를 생각과 구분하지 못할 때 너무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생각이 그저 생존을 위해 원시인류부터 현재까지 쌓아온 불안한 DNA의 코딩 결과이거나 겁 많은 병아리가 현실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뛰어다니면서 외치는 소리임을 알지 못하면 세상은 그 자체로 고통입니다. 부처님께서 온통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한 것은 깨어남 이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딱 맞는 말입니다.



나의 에고는 충직한 애완견?


에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이 전쟁통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놀이터처럼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내 마음의 필름이 영상으로 나타나는 스크린과 같습니다. 내 눈앞에 세상이 전쟁터처럼 살벌한 장면만 벌어진다면 그것은 내 마음의 필름을 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세상이 전쟁통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면서 쫓아다녀야 할 텐데 약 1%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시인처럼 생존을 위해 조바심을 내는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높이 떠올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에고의 특성을 활용할 줄 압니다. '참 나'가 원하는 진정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방향에 맞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사용하는 법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몸조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만들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생각, 감정, 몸은 모두 '참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니까요.


이 사람들의 깨달음의 차원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불쾌하거나 불편하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미뤄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만 세상이 놀이터임을 알게 됩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도, 불편해도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호기심을 유지하며 '참 나'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 나갈 수 있을까를 탐구합니다. 이런 태도가 그들을 이 세상의 주인공의 자리로 밀어 올립니다. 이런 사람들의 에고는 충직한 애완견 과 같습니다.



낯선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면 으르렁대며 경계합니다. 이것은 원시인이 늘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여서 주변을 경계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상황을 미리 감지하여 '참 나'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죠. 만일 그 낯선 사람이 나의 친한 친구임을 알고 그 친구도 개를 좋아한다면 애완견은 이내 경계를 풀고 그 친구에게 꼬리를 흔들 것입니다. 이렇듯 '참 나'의 통제 아래에 있는 에고는 충실한 파수꾼 역할을 합니다. 잔디밭에 애완견을 풀어놓고 함께 달린다면 자유로움을 만끽할 것입니다. 때로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서로 기대어 살짝 잠이 들 수도 있습니다. '참 나'의 깨어남 이후에 에고는 이렇게 자유로운 느낌, 따뜻한 느낌을 자주 느끼면서 나의 감정을 내 인생을 풍족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의식의 진보가 일어나면 몸도 '참 나'의 인생 여정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하는데 필요한 만큼 충실하게 가꾸어 나갑니다.


에고는 우리 삶을 지키고 풍성하게 하는 좋은 도구


이렇듯 '참 나'가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지 않고 우리의 의식 위로 떠올라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에고의 모든 속성, 즉, 생각, 감정, 몸이 모두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때로 에고를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영성 단체나 수행자들을 보게 되는데 저는 그분들과는 좀 다른 입장입니다. 에고는 낮은 의식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삶을 제 멋대로 끌고 다니며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깨어남 이후에 의식의 진보가 일어나면 날수록 에고는 충직한 애완견처럼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파수꾼이자 자유로움과 따스함을 만끽하게 하는 좋은 동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CEO의 의식의 확장이 필요한 시대


CEO의 의식이 '나'라고 하는 개인의 경계를 벗어나 인류의 입장에서 가족과 직장, 이웃과 사회, 지구와 우주로 끝없이 확장되면, 그 모든 것을 사랑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높은 시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CEO가 창조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道를 깨닫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원리에 나를 동기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고 가족의 안녕을 지키며 직원들에게 일정한 수준의 급여와 복지를 챙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거꾸로 지구와 우주를 위한다고 직원들에게 급여를 줄 수 없고 가족들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가져다줄 수 없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의 시선이 높아진 결과로 가족들의 안녕이 위협받는 지경이라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길입니다.



그러나 무한정 가족과 직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업의 이윤을 고스란히 그들에게만 돌리는 것도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직원들의 안녕과 복지를 일정 부분 만족시켰다면 그들에게도 사회와 공동체, 지구를 위한 더 큰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어야 하고 CEO가 먼저 그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며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의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의식의 진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에고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의식의 진보에 따라 자아의 경계가 확장된 CEO에게 ESG 경영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나에게서 떠오르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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