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무위행(05)
예수의 무위행(05)
2장. 건너가세, 건너가세
예수는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다. 제자들과 그 제자의 제자들이 자신이 경험한 대로, 성령(배경자아)의 이끄심을 따라 쓴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라는 것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기억자아의 생각을 배경자아의 깨달음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예나 지금이나 많다. 각자가 깨달은 대로 적다 보니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분명한 깨달음의 자리에서 보지 않으면 제아무리 성경이라 하더라도 혼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절대 진리처럼 여겨지는 신약성경이 정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1. 다양한 기록들이 성경이 되는 과정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사실 아타나시오가 정한 27개의 신약이다. 그것도 여러 교부들이 의논하고 기도하고 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의견에 가깝다. 아리우스가 나이가 든 상태에서 경쟁을 하다가 아리우스가 죽자 세력이 약해지는 도중에 무려 5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타나시오가 워낙 장수하는 바람에 그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되어 신약성경이 정해지고 외경은 제외되었다. 아타나시오의 삼위일체론과 아리우스의 인간예수론이 모두 의미는 있지만 진리의 실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것도 원전 자체가 가지는 한계를 감안하면 온전하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는 아타나시오에 의해 발췌된 예수와 사도들의 일부 행적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성경이 글자 한자 틀림없이 무오 하다거나 성경에 쓰여 있으니 진실이라는 말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온전한 것은 못된다.
예수의 역사적 내용을 이해하거나 성경을 글자 그대로 탐독한다고 진실에 다가설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알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지? 예수를 인식하는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만을 안다면 허망한 데 빠지기 쉽다. 예수를 안다면서 신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요즘도 판을 치고 다니니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마음이 절실한 때이다. 예수께서도 무리와 함께 계시다가도 홀로 빈 들에 나가신 적이 많았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간 광야에서 집중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셨을 것이다. 그때 사탄이 시험했다는 것, 미혹을 물리치자 천사가 수종 들었다는 것 또한 모두 예수의 내면에서의 사건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천사나 사탄의 존재는 다분히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지, 유대의 전통적 개념은 아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홀로 수행하는 것도 유대의 전통은 아니다. 예수는 분명히 유대인이지만 유대의 전통대로 하나님을 인식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전통을 이해했지만 전통에 매이지 않았다. 예수는 본질을 향한 갈망을 밖에서 구하지 않고 내면에서 찾았다.
오늘날 기독교의 어려움은 이것이다. 누군가는 가르치려고 하고, 누군가는 배워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한참 벗어나는 일이다.
예수가 묵상하고 깨달은 본래 자리, 인류의 기초적인 자리, 배경자아가 선명하게 드러난 그 자리에는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다. 남녀가 따로 없고 노소가 따로 없다. 부귀와 비천이 따로 없는 이 자리가 배경자아의 본래 자리이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 또는 야훼, 구약의 여러 사건과 이야기들을 빌어서 말하신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과 이스라엘의 역사, 유대인의 부족신 야훼는 예수께서 역사 속의 한 인물(경험자아와 기억자아)로 살아가도록 처해진 실질적인 배경이다. 그런 문화적 배경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2천5백 년 전 인도의 전통과 역사 안에서는 붓다가 나올 수밖에 없고, 같은 시대 춘추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는 노자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진리의 본래 자리(배경자아 > 살리는 영> 부활생명)를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기억자아(에고)의 욕망과 경험자아(육체)의 본능에서 떨어져 나와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배경자아> 영생> 부활생명)에 관한 내용을 깨달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곧바로 이 자리를 드러낸다.
성경도 예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모두 다 살리는 말씀이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접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러니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모두 아멘이다.
우리가 이다지도 신성하게 여기는 예수의 행적과 사도들의 편지는 아타나시오가 정하고 로마황제가 승인했다. 아타나시오가 이 부활생명(배경자아)의 관점에서 성경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마황제는 분명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는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단이 필요했지, 부활생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는 아타나시오에 의해 진행된 삼위일체론과 신약성경의 정립과정이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 1차 니케아공의회 니케아 신경 발표
●33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 아리우스의 모든 저작물 소각
●336년 아리우스 사망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 - 동서 로마 통합
●362년 율리아누스 - 아리우스 파 대주교 게오르기오스 살해, 니케아 신경 재확인
●363년 요비아누스 - 니케아 신경 재확인
●366년 발렌스 동방황제 (친아리우스 성향) 아타나시오 추방, 4개월 만에 시민들의 폭동으로 다시 복권
●367년 신약성경 27권 목록 제정
●373년 아타나시오 사망
●397년 어거스틴의 주도로 아타나시오의 신약성경 27권 공식 승인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도 있지만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도 많다. 말 그대로 정치판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힘의 논리가 성경의 정립과정에 깔려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 엄청난 일이다.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오 주도의 니케아 신경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되었다. 그의 저작은 모두 불태워져 남아있지 않아서 무엇 때문에 금욕적이고 굳센 성품의 아리우스가 그토록 미움을 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2. 성경은 배경자아의 안목으로 보아야...
이런 성경의 정립 과정을 보면서 흔들리지 않는 관점이 필요하다. 예수가 육체를 벗고 그리스도가 되신 과정을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떠나 배경자아를 오롯이 남기려는 영적인 여정으로 이해한다면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의 수십 년 간의 기독교인으로서의 교회생활은 모두 기억자아 속에 기록된 것이다. 모두 아름다운 일들이고 있어야 할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자아의 인식은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배경자아의 목소리를 기억자아의 생각으로 들으면 모두가 혼란스런 내용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참 좋은 말 같지만 기억자아의 입장에서 곱씹어 보면 참으로 저주와 같은 말씀이다. 마치 진열장에 진열된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 음식처럼 보기는 좋아 보이지만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예수처럼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테레사 수녀와 같이 이 말씀을 실천하는 이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 그렇다면 누가 성경대로 살려고 하겠는가? 800만 분의 1 확률의 로또를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로또 1등이 내게도 당첨될 거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러니 수십억 분의 1 확률로 지킬 수 있는 성경을 믿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러나 배경자아의 입장으로 이 말씀을 들으면 당연한 말이다. 배경자아의 입장에서는 나와 타인의 경계가 기억자아의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자아의 육체로 본다면 분명히 나의 피부가 나의 경계가 되고, 기억자아의 생각으로 보자면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만큼만 같은 부류로 보게 된다. 그러나 배경자아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한 점에서 시작한 공통조상을 가진 인류이다. 그러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경자아의 안목으로 들으면 "너와 네 이웃의 경계가 어디냐? 모두가 하나가 아니냐?"라는 말처럼 들린다. 인간으로서는 우리 모두가 개별적이다. 그러나 인류로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이다. 성경은 한 개인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인류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책이다. (물론, 인류로서 살아가는 지혜 속에 개인의 행복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여러 혼란스런 일도 배경자아(참 나)의 분명한 인식이 부족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누구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을 당해 가장 추악한 사람을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은 가장 저질적인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 여전히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종교적인 논쟁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아타나시오가 아리우스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의 주류로 자리 잡는 과정만큼이나 정치적인 사건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는 참 나, 살리는 영, 부활생명, 예수의 마음, 하나님의 본성, 신의 성품, 본래 자리, 텅 빈 본래면목... 모두가 다 이 한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를 알면 이 혼돈 가운데서도 도도히 흐르는 영생(배경자아에서 울려 퍼지는 풍성한 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