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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May 15. 2023

건너가세, 건너가세 : 예수를 넘어

예수를 넘어서...


2장. 건너가세, 건너가세



1. 예수를 넘어...



1. 울타리가 필요한 사람들


많은 교회나 절에는 평범한 대중이 절대다수입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 사람을 따르려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주된 에너지원으로 삼고 안전한 울타리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리스도나 붓다조차 경험자아의 육체나 기억자아의 생각으로 혼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가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랐던 유대인들처럼 누군가가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에게 속하고 싶어 하거나 어떤 울타리를 만드는 분이었던가요? 이런 의식으로는 예수의 육체에 머물러 그 모양을 사모하므로 그의 본질인 생명 주는 영에 대해서는 모호하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울타리는 곧 우리를 말합니다. 양들을 모아 놓은 우리가 되죠. 처음에는 늑대로부터 보호하던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라는 무리가 됩니다. '우리'는 '나'를 압박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때로는 이런 우리가 필요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자유를 억압하고 어떤 틀을 만듭니다. 그 틀 속에서 생명력은 사라져 가죠.



예수는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겠다고 했는데 우리를 만든 사람들은 양들이 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점점 더 우리를 단단하고 높게 쌓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양들은 길이 필요 없어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도배하곤 하죠.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비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우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를 만들어준 가장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표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묘한 개념과 스토리로 연약한 사람들을 옭아 매어 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쉬운 양식(울타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말씀)을 먹는 대중(우리)에 머물지 않고 제자의 길에 들어서서 예수의 심정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2. 우리를 벗어난 사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종의 고승 임제 선사의 말에서 부처는 형상으로서의 언어이기에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야 할 개념,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부처가 죽어야 탐진치가 끝난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반야般若(prajna)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세계를 막고 있는 것이 어떤 개념으로서의 부처입니다.


예수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예수라는 개념, 기독교라는 거대종교의 창시자, 나를 위해 희생한 고귀한 성자로서의 예수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길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하나의 형상이 형상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본성, 생명 주는 영의 세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예수라는 개념이 죽어야 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누가 실제의 예수를 알겠습니까? 역사를 뒤지고 고고학적인 추론을 아무리 해도 지푸라기 무더기를 뒤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소아시아 어느 산기슭에서 판자 조각을 발견하고서 노아의 방주를 찾았다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았던 한 지점, 본래면목, 신성, 부활생명의 본질, 배경자아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해야 비로소 예수의 삶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3. 우리를 떠나 비로소 만나게 된 예수의 본래면목


홀로 종교를 떠나 예수의 진면목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직은 이런 말을 아무에게나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게는 확실하고 당연한 말인데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거나 어렵게 들릴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제 마음을 그대로 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감사한 일입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보통사람들과는 그냥 고만고만한 이야기지만 최대한 소화하기 좋게 말해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본래 자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들처럼 쉽게 말하는 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라는 존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영안에서 어찌 그 비밀을 대중들 눈높이에 맞춰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얘기하실 수 있었을까? 어쩌면 글도 모르고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고역이었던 가나안 촌동네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 참 신기합니다. 저는 예수를 죽였는데 돌아보면 참으로 예수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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