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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May 11. 2023

예수의 무위행(03)_사피엔스의 뇌와 배경자아

배경자아를 알아차림

예수의 무위행(03)


사피엔스의 뇌와 배경자아



진실은 중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실체를 감각적(경험자아)으로 이해(기억자아)하는 사람과 높이 떠오른 시선(배경자아)에서 경험하는 사람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것처럼 다르게 보인다. 물론, 배경자아의 눈에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삶이 이해가 되지만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시선에서는 배경자아의 삶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양자물리학을 하는 사람은 고전물리학을 당연히 이해하지만, 고전물리학만 아는 사람은 양자의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전물리학 세계의 천재 아인슈타인조차도 마지막까지 입자와 파동의 중첩, 관찰자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 등 수많은 양자역학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사피엔스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



이런 이상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피엔스의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알아차려야 한다.

사피엔스의 뇌는 두개골이라는 감옥에 갇힌 채 외부세계를 실제로 접하여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인식하고 산다. 이 감옥의 창틈이 8가지 있는데, 이런 8개의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통각:온도감각, 고유수용성감각, 내수용 감각)이라는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정보(경험자아의 경험)를 가지고 그것이 마치 세상의 실체인 것처럼 인식(기억자아의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피엔스는 죽는 날까지 그 감옥을 벗어날 수 없다.



감옥 옆 방의 다른 사피엔스는 조금 다른 각도로 세상을 인식하고 윗 방의 다른 사피엔스는 조금 더 높은 각도로 볼 수 있다며 우쭐댄다. 아무도 감옥 바깥의 실제 세계를 직접 경험한 적은 없는 채로 서로 자신의 감방에서 다른 감방의 사피엔스를 판단하고 살아간다.


배경자아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그리스도(배경자아)는 감옥 밖 실제 세계의 흙을 밟아 보고 나무를 만져보고 냇가에 발을 담그고 생명수를 맛본다. 창조된 모든 세계는 인류에게 허락된 축복의 바탕이다. 그 풍성함을 자유롭게 누린 뒤 스스로 감옥으로 다시 들어간다. 제한된 세계인 감옥에 갇혀 8가지 감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높이에서 말해내는 사피엔스의 모양을 한 모양 없는 그 무엇이다.



그리스도(배경자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산의 모든 것을 맛보고 누림으로 생명의 풍성함이 8가지 감각으로 경험하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 갇힌 사람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배경자아는 개인이 아니다.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는 개별적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 알지만 배경자아는 개인으로 태어나 인류로 살아간다.


배경자아는 개인으로 태어나 인류로 살아간다.



배경자아의 삶의 방식


그리스도(배경자아)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보인다. 원죄에 빠진(배경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 집착하는) 죄인들을 위해 고귀한 자신의 몸을 드린 희생제물처럼 보인다. 이런 스토리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해설판 정도의 이야기이다. 곧바로 진실을 말하면 듣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방편으로 말하는 것뿐이다.



배경자아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곧바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개인이 죽고 완전한 인류의 대표자로 살아났다. 육체는 못 박히고 영은 해방된 것이다. 배경자아는 경험자아의 껍데기와 기억자아의 한계 속에서 나타나지만 십자가에서 그 한계를 벗은 것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통으로 하나로 인식된 높은 인식의 결과로 그 길을 간 것뿐이다. 이것은 인류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이다. 분별없는 시선으로 로마병정과 여인들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에 신성의 충만이 담긴 것이다.



예수는 한 개인으로 태어났으나 성장하는 과정과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 배경자아에 대한 확연한 깨달음을 얻었다. 개인으로 태어났으나 점차 인류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에게는 자신을 찌르는 로마병정이나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여인들이 타인이 아니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인류로 보였다. 배경자아(그리스도)의 눈에는 모든 개인이 배경자아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류로 보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자와 아이들, 죄인과 종교인, 그리스도인이나 붓다의 제자들이나 모두 하나다.



마치 붓다의 시선에는 자기를 따르는 자와 자신을 죽이려는 앙굴리말라가 하나로 보이는 것과 같다. 앙굴리말라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서 악명 높은 살인자였다. 그는 사람을 죽여 그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하고 다녀서 앙굴리(손가락) 말라(목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99명을 죽이고 백 명을 채우는 것이 목표였던 앙굴리말라 앞에 석가모니가 나타났다. 그는 "저 사문을 죽여 백 번째를 채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석가모니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쫓아가도 평온한 걸음을 걷는 석가모니가 계속 몇 발짝 앞서서 가기에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앙굴리말라는 소리쳤다. "멈춰라!" 그러자 석가모니가 대답했다. 석가모니가 대답했다. "나는 이미 멈추었다. 멈추지 않는 것은 너다. 네가 멈추어야 한다." 그제야 앙굴리말라는 기억자아의 집착을 알아차리고 멈추게 되었다. 멈춘 뒤 앙굴리말라가 다시 물었다. "지금 멈추는 것은 늦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나를 때리고 죽이려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대답했다. "걱정도 생각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그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고 아라한이 되었다. 붓다의 시선에서는 흉악범도 인류로 보이기에 분별하여 배제하지 않았다.



배경자아를 알아차림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서는 모두가 다르고 분별이 있으나 배경자아는 인류 공통의 속성이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려는 기억자아의 집착에 머무르면 모든 인류는 경쟁자다. 이런 정도의 인식으로는 더 높이 올라도, 더 많이 가져도 그에게 평안이 없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분별하는 방식의 앎은 개인에게는 능력을 주고, 인류에게는 문명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이렇게 분별하여 아는 방식(분별지)으로는 맛볼 수 없다.


평안과 안식은 배경자아의 지혜로부터 나온다. 나와 너의 경계가 따로 없는 자리, 무분별의 지혜(무분별지)가 바로 배경자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나의 평안(배경자아로부터 나오는 평안)을 너희(기억자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준다고 한 것이다. 불교의 전통으로는 텅 빈자리, 본래면목(스크린)을 알아차리는 자리이며 기독교의 전통으로는 부활생명의 안목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도덕경을 읽은 분들이라면 무위자연의 품성으로 물처럼 흐르는 삶(상선약수上善若水)을 살 것이다.



경험자아의 본능과 기억자아의 집착을 멈추지 않으면 배경자아를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알고자 하나 예수의 스토리와 개인적 모양(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 치우칠 뿐 그의 본래 성품, 그리스도, 생명주는 영으로서의 본질(배경자아)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수는 기억자아의 눈으로 봐도 존경받을만한 훌륭한 인물이다. 종교인들은 그를 찬양하고 숭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경자아의 눈으로 보면 그는 모든 인류의 원형이고 그가 살았던 모든 삶이 바로 이 바탕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된다. 예수는 그것(배경자아, 신의 성품,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모든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



십자가로 가기 전 개인으로 살 때 예수는 파트타임 그리스도였다. 그도 육신(경험자아)이 있었으니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먹어야 했다. 생각(기억자아)이 있으니 때로는 슬프고 분노하고, 때로는 기뻐하기도 했다. 십자가 이후로 예수의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완전히 껍질을 벗고 온전한 배경자아가 되어 풀타임 그리스도로 변모 transform 한 것이다. 인간 예수의 본래면목인 그리스도(배경자아)의 눈으로 예수를 보지 못하면 예수가 성인으로 보이고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기억자아의 시선으로는 이 자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배경자아의 자리에서 보면 그는 우리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간 사람일 뿐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연히 알게 된다. 그러니 그리스도(배경자아)가 아니면 그리스도(예수의 본래면목)를 볼 수 없다.


배경자아의 눈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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