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드라마가 펼쳐지는 배경
예수의 무위행(2) : 인생 드라마가 펼쳐지는 배경, 배경자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 하라!"
경험자아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바울은 명령인 듯 말한다. 이 말씀을 지키는 경험자아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 예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기뻐할 수 없었다. 그도 때로 애통하였다. 한가한 곳에서 빈들로 나가 기도하였지, 쉬지 않고 기도할 수는 없었다. 기억자아의 안목에서 이 말씀을 지키려는 것은 경험자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제 아무리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이 말씀은 지키지 못할 것이다.
호흡과 배경자아
이 말씀은 배경자아를 인식할 때 가능한 말씀이다. 어쩌면 배경자아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경자아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순간순간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위빠사나 명상과 닮아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형태(경험자아)를 만든 뒤 그 코에 자신의 '숨(호흡)'(살려주는 영, 성령, 배경자아)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났을 때 '숨(호흡)'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왜 굳이 요한은 예수가 '숨'을 내쉬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썼을까? 그 말을 빼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데 굳이 숨을 내쉬었다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방식과 유사하게 예수의 부활생명(성령, 그리스도, 배경자아)이 전해지는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싶다.
붓다는 아나빠나사띠(호흡관찰) 명상에 대한 내용을 굉장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늘 현재에 깨어 있어서 경험자아의 본능이나 기억자아의 집착을 알아차리고 본래 자리(배경자아)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는 방편을 말하고 있다. 인도의 수행전통에서는 이것이 괜찮은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예수는 스스로 어떻게 수행을 했는지, 제자들에게 그런 방법을 가르쳤는지 성경에는 그 방법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없다. 바울의 이 말이 명상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호흡 알아차림 명상이 아니면 이렇게 할 현실적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예수 자신은 40일 간 광야에서 이런 방식으로 수행을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유대인들의 전통에서는 이런 수행법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져서 가르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수행법을 가르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저 함께 사는 것이 그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셨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작별하기 전에 노파심에서 호흡을 통해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법의 중요성을 언급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움직이는 원리가 분별심(선악과)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허망함을 배경자아의 시선으로 확연히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예수는 40일 광야에서의 수행기간 동안 자신의 본질이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아니라 배경자아라는 깨달음이 확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안목이 분명하다면 호흡을 어떻게 하든 큰 상관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경험자아의 본능과 기억자아의 욕망으로부터 떠오르는데 호흡만큼 손쉬운 방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스크린과 같은 배경자아
배경자아는 스크린과 같다. 수많은 장면(경험자아들의 나툼)이 오고 간다. 장르는 다양하다. 액션, 멜로, 호러, 동화 등등 온갖 드라마가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기억자아들은 저마다의 기억과 정체성에 사로잡힌 채 자신만의 드라마 각본을 쓰고 있다. 이 각본과 저 각본이 충돌하며 자신이 쓴 각본대로 드라마가 진행되는 경우는 전혀 없다. 그래서 드라마 각본을 쓴 기억자아는 현재적으로 상영되는 드라마가 자신의 각본과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때론 고통스럽다. 그래서 다시 각본을 고치느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예수는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짐을 벗게 하기 위해 배경자아를 인식한 삶(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현실이 모두 각자가 만든 드라마임을 알아차리는 것, 부활생명의 시선)을 곧바로 가리켜 말한다. 스크린 위로 온갖 스펙터클한 장면이 펼쳐지다가도 영사기의 전원이 꺼지면 스크린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드라마는 일순간 사라지고 텅 빈 배경자아만 남는다.
명상,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방편
그래서 붓다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오온)가 모두 공하다고 한다. (오온개공五蘊皆空) 베드로전서 (1장 24~25)에서는 모든 육체(경험자아)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기억자아)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배경자아)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한다.
영사기의 전원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육체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전원은 켜진 채로 스크린에 비친 장면을 일시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영사기의 렌즈를 덮개로 덮는 것이다. 밖으로만 향하던 눈꺼풀을 덮고 고요히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은 원래 기독교 전통에서 나오는 말을 일본인들이 번역하면서 마치 불교의 전유물처럼 혼동되고 있는 말이다. 흔히 묵상이라고도 불리는데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것이다.
묵상(혹은 명상)은 배경자아로서의 본래 모습(본성 本性, 자성 自性, 자연 nature)에 이르러 그것과 함께 머무르며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것을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소리라고 했고 예수는 하나님(유대적 전통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소통이 되었을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깨달은 이들은 청정한 마음으로 배경자아의 본질에서 나오는 소리에 따라 살면서 세상을 깨끗게 하고 만물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배경자아의 자리를 깨달은 이후...
제자들은 깨달음의 극치에 이른 예수의 놀라운 모습을 보고 황홀해하며 그 모양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예수는 그런 기억자아의 허망한 말에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변화산을 내려온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깨달음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여전히 어리석음과 무지 속에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뒤엉켜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무리들 가운데서 살아간 사람이 바로 예수이고 붓다이다. 이것이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색즉시공만 깨달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도인처럼 산속에 은거하거나 혼자만의 삼매에 빠지기 쉽다. 색즉시공뿐 아니라 공즉시색의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깨달음이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는 그래서 허물 많은 사람들, 병자와 아이들과 여인들과 함께 사셨고 붓다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