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자아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그 학자의 이론이 나뉘게 된다. 가장 가시적인 자아의 구성요소인 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점도 꽤 있다. 어쩌면 이런 분류를 그 학자의 의식의 한계나 깊이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아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하는지는 심리학자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매우 큰 영향을 준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인식 없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인 자아를 어떻게 나누는지 살펴보자. (각 학자들의 이론을 조금만 살펴보려고 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을 염려해 간단하게만 정리해 보았다.)
프로이트는 id(육체), ego(사회적 자아), superego(무의식)로 나누었다.
융은 자아(ego 개별적 육체와 정신)와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었고 그 바탕에 에 자기(self 심층 자아, 영성에 가까움)가 있다고 보았다.
함석헌의 스승이자 한국이 낳은 세계 100대 사상가로 불리는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아를 몸나(육체), 제나(생각), 얼나(영성)로 구분하였다.
과거의 심리학이 각 학자의 개인적인 통찰과 견해라는 한계점을 가진 것에 비해 현대 심리학은 대체로 실험을 통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실험적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심리학자라고 취급도 못 받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 심리학은 인문학적 내용을 상당한 정도로 과학적 방식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러니 정신을 몸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현대 심리학은 뇌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의 심리뿐 아니라 영성의 실체에 다가서고 있다. 다음은 현대심리학이 대체로 합의점을 찾은 자아에 대한 이해방식이다.
● 경험자아 : 현재를 바탕으로 생존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자아. 자율신경과 뇌의 기초적인 활동을 통제하며 각성과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활동한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표현으로는 몸나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육체 physical body와 가깝다. 불교적으로는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五蘊) 중에서 색수色受에 해당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id와 가깝다.
● 기억자아 :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삶의 양과 질을 모두 고려하는 자아. 각성 상태에서 주로 활동한다. 유영모 선생의 표현으로는 제나에 가깝다. 융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 persona가 기억자아에 가깝다. 경험자아를 hardware라고 하면 기억자아는 software에 가깝다.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한 데 묶으면 soma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적으로는 오온五蘊 중에서 상행식(想行識)에 해당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ego와 가깝다.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짓는 특징을 기억자아로 생각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사회적으로 Self identity는 기억자아라고 통용된다.
● 배경자아 : 경험자아가 기억자아에게 영향을 주고 기억자아가 경험자아를 통제하는 일련의 과정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자아. 메타인지의 주체이며 자신을 제 3자 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말한다. 많은 자기 계발서적에서 말하는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수준의 의식도 배경자아와 가깝다. 유영모 선생의 표현으로는 얼나에 가깝고 중립적인 표현으로는 영성, 신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으로는 성령, 하나님마음, 그리스도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불교의 전통으로는 法, 佛, 본래 성품, 본래면목, 참 나, 眞如心 등으로 말한다. 힌두전통에서는 아트만이 배경자아와 가깝다고 볼 것이다. 노자의 말로 하자면 道라든가 自然이 바로 배경자아와 가장 근접한 개념일 것이다. 일부 영성을 추구하는 과학자들은 우주의 에너지, 양자장, 파동(주파수) 등 다양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배경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한평생 경험자아가 경험한 사건이 기억자아에게 축적되어 개인의 성격을 형성한다. 성격은 특정 상황에서 감정을 바탕으로 특정 행동을 선택하는 패턴을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성격은 그 사람의 평생 동안 조금씩 미세한 조정을 거치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유지된다. 성격은 개인의 장기적인 행복도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이다.
안타깝게도 배경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은 낮은 시선으로 개별적 자아인 기억자아의 범위 내에서 살게 된다. 아무리 넓은 대저택에 살아도 기억자아의 의식이 좁다면 작은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사는 것처럼 딱한 형편이다. 기억자아(에고)의 의식이 편협하면 경험자아(몸)의 실제적인 경험의 질도 낮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기독교 전통으로는 죄罪(하나님 마음-배경자아를 모른 채 자기 배-경험자아를 신神이라고 알고 살아가므로)라 하고, 불교에서는 고통이라고 한다.
붓다는 인간의 심리를 가장 깊이 까지 파고들어 하나씩 분석하고 그 작동방식을 이해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깊이에까지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지혜를 번역하는 데는 다소 혼선이 있는 듯하다. 이것은 언어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심외무법(心外無法)
이 마음 외에는 진실이 따로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 곧 배경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마음을 기억자아의 개별적이고 욕망에 물든 마음으로 이해하면 모든 것이 다 꼬이고 만다. 이 본래 마음, 청정한 마음을 기억자아의 눈으로 바라보니 불법佛法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개미가 바라보는 2차원의 평면에서는 3차원의 높은 하늘이란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나 하나님 마음도 바로 배경자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안목이 없으면 성경의 상당 부분은 이스라엘의 난해한 역사와 제사방법, 설화처럼 보이는 이야기들, 비슷한 상황에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들이 충돌하는 어려운 책이 되고 만다.
붓다가 깨닫기 전에 바라본 인생은 고통의 바다, 그 자체였다.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왜 병들고, 늙고, 죽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보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생로병사의 윤회 속에서 참된 안식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여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의 지위를 내려놓고 수행자(사문)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기억자아의 궁극적 생각인 통찰 지혜를 파고들었다. 정신적 쾌락의 끝이라고 하는 선정체험을 통해 그는 고통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얼마나 총명했던지 싯다르타는 몇 개월 만에 그의 스승인 알라라 깔라마와 같은 최고 수준의 선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황홀한 체험은 그가 명상을 할 때만 이어졌고 생활에서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선정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경험자아의 욕망을 제거하면 고통을 벗어날 줄 알았다. 그는 웃다까 라마뿟다라는 지혜로운 스승을 찾아가 극한의 용맹정진 수행을 통해 고통의 끝까지 가보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만큼 철저히 고행을 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경험자아의 욕망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까지 욕망을 끊어 보았으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그만두었다.
대승불교의 기틀을 닦은 나가르주나(용수)의 空공 사상은 본질을 곧바로 가리켜 알게 하는 直指人心직지인심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려면 그의 말을 배경자아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경전과 깨달은 자들의 어록이 죄다 이 한 자리를 설명하고 있음을 확연히 보게 된다. 깨달은 자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방편으로 말하고 있을 뿐 본체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기억자아에서 배경자아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이 깨달음인데 이 깨달음 없이 성경이나 불경을 보고 있으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는 일을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 장님(배경자아의 의식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또 다른 장님)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상대도 망치고 자기도 망치는 허망한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거나 그냥 재미있게 살면 된다. 모르는데 누군가를 이끌고 싶어 하는 이들(나르시시스트)에게 가장 먼저 먹잇감이 되는 사람들이 선량하고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선량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신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한다는 허망한 소리를 하는 종교인들이 상당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배경자아는 밖으로 찾아다니며 구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배경자아)은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곧바로 알려주신 것이다. 이 말을 선종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기억자아의 틀속에 진리를 구겨 넣으니 깨달은 자들의 말과 경전이 온통 뒤틀리고 오염되어 종교가 세상을 염려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심리학이 종교를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영성은 더 이상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삼성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들과 유수의 선도적인 단체에서 마음챙김을 통해 영성에 다가가는 것은 종교로의 회귀가 아니다. 마음의 실체로써 배경자아를 확연히 알아차려 더 높은 시선을 얻으려는 매우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계를 확장하여 높은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산업계와 사회문화계를 주도하는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종교는 고려대상이 아닌 지 오래되었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영성의 실체에 다가서는 이 시대에 종교는 어떤 해답을 내놓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