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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May 29. 2023

건너가세, 건너가세(3)_종교를 넘어

예수의 무위행(06)


예수의 무위행(06)

2장. 건너가세, 건너가세



3. 종교를 넘어…


오늘은 많은 스승들을 모두 좋아 하지만 내가 예수를 더 선호하는 까닭을 잠잠히 살펴보았다.



1. 무위행(無爲行) by 노자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取天下 常以無事 (취천하 상이무사)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배우려 하면 날로 늘기만 하고 道도를 구하면 날로 줄어든다.

줄이고 또 줄이면 無爲(인위적 행함이 없음, 자연스러움)무위에 이르게 되고,

無爲(인위적인 것이 없는 자연스러움)무위에 이르면 不爲(하지 못함)불위가 없다.

천하를 취함에는 항상 無事(일이 없음)무사로 하니,

有事(일을 만들어 냄)유사로는 천하를 취하지 못하게 된다.






무위행無爲行이라는 노자의 말은 바로 콕 찔러서 핵심으로 들어간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참 좋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경자아를 이해할 수 없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억자아에 머무는 사람들은 유위행(일을 조작하여 만들어서 함) 밖에는 할 수가 없다. 無爲무위(수고로움과 땀이 흐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행하는 것이 배경자아의 행동 방식이다. 여전히 기억자아를 나라고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배경자아를 바로 가리켜 보이는 것은 언제나 오해의 소지가 많고 때로는 말하는 사람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본 뜻을 알면 참으로 지혜로운 말이다.



2. 머무는 바 없는 마음 by 붓다


중국 선종의 6대 조사 혜능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유명한 금강경의 한 구절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내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내라는 붓다의 말은 참으로 선명한 말이다. 머문다는 것은 집착한다는 것인데 집착의 대부분은 아상我相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상我相은 '나'를 기억자아와 경험자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개념이다. 이러한 '나'라는 개념은 얼마나 헛된 것인지 붓다는 무아無我를 강조하셨다. (물론 아我라는 말이 아트만이라는 음차라는 해석도 있다. 이 말도 궁극적으로는 아트만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므로 뿌리에서 보자면 그렇게 다른 말은 아니다.) 배경자아는 개체성(경험자아나 기억자아의 속성)이 소멸된 궁극적 총체이기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붓다는 정말 인간의 마음속을 깊이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3. 다이몬의 소리 by 소크라테스



다이몬의 소리를 들어라!



다이몬의 소리를 들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참 진실하다. 하지만 다이몬의 소리(배경자아)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들리거나 "저 놈이 미쳤나?"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이런 말하기 방식은 그 시대에서는 선구적이었으나 너무 앞서 나갔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이몬이 새로운 신의 이름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흔히 다이몬을 양심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의식이 기억자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번역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영의 안목에서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어린 시절부터 들었다고 하는 다이몬의 소리는 바로 배경자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이다. 예수가 열두 살에 성전에서 유대교 선생들과 질문을 주고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지혜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지혜가 나오는 자리가 바로 다이몬(배경자아)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자리이다. 이 자리를 불교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완전히 텅 비어 있는데 기묘한 것이 있음)의 자리이고 본래 성품의 자리라고 한다. 붓다가 고행과 삼매체험으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다 놓아버리고 죽 한 사발을 공양받고 지쳐서 쉬는 도중에 깨달음을 얻은 바로 그 자리이다. 육체의 본성(기억자아)과 생각으로 만든 욕망(경험자아)에서 떠올라 배경자아가 자신의 본래 성품임을 알아차린 그 자리다.



4.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by예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을 '남몰래' 선행을 하라는 것으로 알아서 익명으로 기부하는 것을 높게 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의 궁극적인 뜻은 '남몰래'가 아니라 '나 몰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누구인가? 경험자아와 배경자아에 속하는 '나'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무위행無爲行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예수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다.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직관적으로 말씀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노자나 붓다가 지혜가 덜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 그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용상으로 본다면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듣는 사람의 수준을 배려하는 예수의 말하기 방식이 오늘날 나에게도 잘 맞는 것 같다. 예수에게는 이런 사람됨, 친절함(Loving kindness)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스승들도 좋아하지만 나는 따스한 성품을 가진 예수에게 더 끌린다.


나는 예수를 기독교의 창시자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바울이 만든 하나의 신앙 체계에 가깝다.


예수를 종교의 창시자라고 굳이 부르자면 내가 볼 때는 '사랑 가득한 친절(Loving kindness)'이라는 종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경자아의 인식이 분명하지 않으면 예수의 이런 가르침도 또 하나의 짐이며 유위조작에 불과하다. 배경자아의 선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런 사랑 가득한 친절(Loving kindness)이 흐르는 곳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생명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다.



배경자아의 인식만 있고 Loving kindness가 없다면 공허한데 치우치기 쉽다. 성품이 조각목이라면 그 위에 입혀놓은 금은 배경자아의 본래 자리이다. 조각목이 거칠면 금을 무지하게 두껍게 발라야 한다. 그러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자들도 성품의 한계까지 초월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중은 배경자아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자리(배경자아)가 따스한 성품을 만나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Loving kindness)를 경험한다.



깨달음은 깨닫는 자신 한 사람에게만 유용할 뿐 확장성이 없다.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이 따스한 성품을 만나서 흐르는 사랑 가득한 친절이다.


하물며 배경자아(영의 안목, 하나님의 성품, 생명주는 영)에 대한 인식도 없고 Loving kindness(듣는 이를 배려하는 따스한 성품)도 없다면 종교는 아무리 멋진 교설과 특이한 체험이 있다 하더라도 유위조작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풍성함이 흐르지 않는 종교는 진실과는 멀뿐 아니라 어쩌면 가장 반대편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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