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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Jun 01. 2023

수면 박탈과 인격 박탈

3장-1. 나의 드라마(종교를 떠나 빈들로 나아가며...)


예수의 무위행(07)


3장. 나의 드라마(종교를 떠나 빈들로 나아가며...)


3-1. 수면 박탈과 인격 박탈



인격의 한계는 어디인가?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행복도와 삶의 질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이 성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라는 말 자체가 다분히 감정에 치우치는 느낌이 들어서 성격을 포함하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그 사람의 됨됨이를 '인격'이라고 하자. 한 사람의 인격은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유전적 요소와 살아온 환경에서 모두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만 3세 이전의 양육환경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때 결정된 세상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대응방식이 평생을 걸쳐 미세한 조정을 거치면서 성인이 되면 그 사람의 어떠함이 인격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인생 전반전의 인격형성의 과정이다.



노년이 되면 인격에 미치는 뇌의 퇴행성 변화를 무시할 수가 없다. 뇌세포의 노화가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에 그 사람이 어떻게 적응하는가 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것이 인생 후반전의 인격형성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생 후반전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깊은 잠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40대~50대의 깊은 잠은 뇌세포의 노화를 막고 정상적인 뇌기능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깊은 잠이 필요한 두 가지 이유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고통, 세 번째 화살)의 내용 중에서 잠에 대한 이야기 일부를 가져왔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깊은 잠이 얼마나 인생 후반전의 인격에 큰 영향을 주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특별히 중년 이후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1. 깊은 잠이 필요한 두 가지 이유 ('고통, 세 번째 화살' 중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되면 통증이 좋아지고 피로가 풀리는 것 외에도 삶을 풍부하게 해 주는 두 가지 효과를 누리게 된다.


첫째, 낮 동안에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을 정화한다.



불편한 사건을 겪으면서 마음에 남는 부정적인 감정은 REM 수면(Rapid Eye Movement 꿈이 많은 수면을 취할 때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을 거치면서 희미해진다. 대체로 수면의 효과를 말할 때 피로를 회복하고 중요한 정보를 기억하게 해주는 깊은 잠(Non-REM 4단계 수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주로 꿈을 많이 꾸는 REM수면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REM수면은 1.5~2시간에 한 번씩 짧게 반복된다. 하룻밤 동안 서너 차례 나타나는데 4단계의 깊은 수면에 이어서 나타난다. 이런 REM 수면 동안 꿈을 꾸면서 낮에 있었던 감정을 희석시키고 정화하게 된다.


수면연구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하룻밤에도 수십 번 꿈을 꾸지만 대체로 기억하지 못한다. 잠을 깨기 직전에 비교적 긴 REM 수면주기가 있는데 주로 이때의 꿈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시간 이내에 잠을 깨는 토막잠(Broken sleep)을 자게 되면 REM 수면이 부족하게 된다. 이런 수면 패턴이 지속되면 부정적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마치 누룽지가 밥솥에 눌어붙은 것처럼 부정적 감정이 뇌 속에 끝없이 쌓이게 된다. 이것은 기억자아라는 소프트웨어에 계속 버그가 생기는 것과 같다. 마치 컴퓨터를 오랫동안 온라인에 연결해 두면 온갖 바이러스와 불필요한 프로그램이 깔리면서 컴퓨터의 속도가 느려지고 부하가 걸리는 것처럼 일상생활 곳곳에서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고 인생예산(체력, 시간, 돈, 의식적 에너지)이 낭비되기 쉽다.


둘째,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도 잘 알아차리게 된다.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3일 간 토막잠을 자게 한 뒤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 속의 인물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맞히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이들은 정상적인 수면을 할 때에 비해 현저하게 타인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알아맞히는 확률이 줄어들었다. 타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는 사람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감정을 사용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감정을 잘 읽을 수 없다면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그러면 관계는 어긋나고 사회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게 된다. 예전의 부족사회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사피엔스는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피엔스는 생존의 양과 질이 떨어지기 쉽다.


단 3일만 깊은 잠을 자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회적 기능이 떨어지면서 풍성한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만성통증 환자들 중 수면장애가 있는 분들의 활동과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를 위한 책 <고통, 세 번째 화살> 중에서



2. 인격, 성격, 감정


‘인격’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람의 '성격'과 연관이 깊다. 종교적 의미로 '사람의 위치', '사람의 품성', '사람의 본질'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자기 머릿속에서 혼자서 생각하는 뇌피셜인지, 어떤 신령한 실체인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인격은 겉으로도 드러나서 사회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한 것은 천사처럼 말하는 사람이라도 실체로서 경험할 수 있는 사랑(Loving kindness)이 나오지 않으면 공허하다는 것이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배경자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마음, 본래 성품)들의 공통점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죄책감은 사라지고 평온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경자아의 시선에서 나오는 ‘무분별의 지혜’ 때문이다. 분별이 사라진 사람의 시선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구분지어서 옳다 그르다, 이런저런 것들을 바꾸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상대를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존재자체로 온전하다고 바라본다. 배경자아의 깊은 안식 안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지혜와 온유와 연민의 마음은 주변 사람들의 가슴도 따뜻하게 만들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평안해진다.



이렇게 그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통사람들은 '성격'이라고 부른다. 성격은 특정 상황에서 일관성 있게 반복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행동패턴이다. 배경자아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배경자아를 인식한 사람이 대체로('반드시'는 아니다. 까칠한 사람도 있다.) '성격'이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배경자아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타고나기를 넉넉한 성격을 가지고 난 사람들도 있다. 아난다마이드라고 하는 낙천적인 화학물질이 뇌에서 많이 나오는 사람은 배경자아의 인식 없이도 성격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좋은 '성격'이 만들어진 사람이 더 사회적으로 쓰임새가 크다. 이들에게는 는 ‘무분별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생명수’가 있다.


나는 예수도 태어나면서부터 성자로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모르는 곤란한 사정,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광야에서의 시험, 배경자아로서의 자신을 깨달은 후에도 그 시대의 사회적인 한계, 함께 한 제자들의 인식의 한계, 대중들과의 소통과 그 한계... 등등 많은 어려운 과정을 통해 그는 나름의 '성격'을 형성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숙한 인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격’과 ‘성격’이 동의어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눈으로 볼 때는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



이렇게 그 사람의 일생을 크게 좌우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성격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감정’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 달라진다. 감정은 느끼는 것 못지않게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해소하는지, 때로는 승화하는지가 그 사람의 성격, 인격을 좌우한다.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성격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3. 불면의 밤을 보낸 노인을 바라보며...


수십 년 간 불면의 밤을 보내며 2시간도 채 못 자는 토막잠을 잔 사람에게서 부정적 감정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누룽지가 냄비바닥에 눌어붙은 채로 그 위에 다시 음식을 하는 것처럼  불안, 두려움, 회한 등의 부정적 감정이 겹겹이 두텁게 쌓인 채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타인의 표정을 보아도 감정을 읽을 수 없을 테니까. 수십 년 불면의 밤을 보낸 병약한 노인이 스스로 아픈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이 스스로 아프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이상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면 그래도 덜 아픈 것이다.



수면박탈이 낳은 인격박탈이라고 보인다. 아주 생리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젊은 사람도 며칠만 수면박탈이 이어지면 판단력이 흐려지는데 수십 년을 그렇게 지내고도 이제야 증상이 나타났다면 실로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대단함을 믿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든다면 비극이 시작된다.


나를 교회로 인도한 사랑하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다. 그 친구는 자신이 주장하는 그 교리를 통해 받은 감동을 설명하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여유란 진실에 대한 갈망이 없이 그냥 먹고살만하다는 뜻임을 서로 알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한 번도 나에게 어떤 판단을 하거나 자책을 심어준 적이 없는 착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이렇게 답했다.


"네가 30여 년 전 나에게 이 교회를 소개한 것은 여전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네가 나에게 이 교회를 보여주었다면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내게 전해주고 싶어 하는구나. 그 마음은 참 고맙다. 그러나 그때 네가 나에게 전했던 것과 지금 네가 나에게 전하려는 것은 내용물이 달라졌다. 마음이 아파서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듣고 싶지가 않다."


이렇게 순진하고 착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물론, 그 친구가 보기에는 내가 여유 있는 바보 같을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 친구와 이런 말을 더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바벨탑이 무너질 때 이러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전혀 다른 말을 하면 수십 년 쌓아온 관계도 일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가여운 사람과 바보 같은 사람들... 이들의 허망한 말을 차단하고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고요히 눈을 감고 내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어본다.



상대의 허망한 말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한숨과 기도가 함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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