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통증의 민낯을 만나는 길
통증기능분석학회 2023 추계학술대회 강의록 초록 : 만성통증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9)
2) 나는 무엇이 아닌가? 생각 편.
나)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생각은 개인의 삶의 질을 가장 크게 바꿔 놓는 요소처럼 보인다. 생각이 바뀌면 그 사람의 전체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계기로 생각이 180도 전환된 사람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바뀌어진 생각조차도 특정한 인연을 따라 좋게 바뀌기도 하고 나쁘게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생각을 나의 실체로 삼을 수 없다.
만성통증 증후군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엄밀하게는 삶을 파괴하는 파괴적 생각)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양한 종류의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버무려진 끝없이 반복되는 후렴구가 많다. 생각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서 맴돌면서 무척 분주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생각뿐이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에 사로 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끌려 다니느라 현재는 모조리 증발해 버리고 만다. 이것이 시간이 만든 신기루 같은 환영을 실제라고 믿는 사람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시간은 원인과 결과를 이으려는 뇌의 작동방식 때문에 생겨난 가상의 개념이다. 과거는 이미 어쩔 수 없는 부도수표요, 미래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약속어음이다. 둘 다 실체가 아니다. 오로지 실체는 지금, 이곳의 현실뿐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 어디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고통의 씨앗이다. 고통은 실체가 없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때 그 힘을 잃는다.
"어제도 힘들었는데 오늘도 여전히 고통스럽네.
내일도, 내년도, 평생 이렇게 살면 어떡하지?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패턴은 대부분의 만성통증 증후군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을 때는 환자의 얼굴에서 정말 죽어가고 있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얼굴의 어원이 '얼꼴'이라고 한다. 얼(정신, 생각)을 담는 꼴(모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얼굴의 표정에는 고스란히 그 사람의 얼이 담겨 있다.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가 고통의 씨앗이다. 이런 고통은 한 개인 뿐 아니라 가정, 나아가서는 한 사회를 조각조각 내기도 한다.
2022년 1월 열반하신 틱낫한 스님의 ‘부디 나를 진정한 나의 이름으로 불러주오.’라는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자. 틱낫한 스님은 뉴스를 통해 열두 살 소녀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들려 유린당하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오랫동안 수행해 온 스님이지만 이 뉴스를 보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어린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적개심이 솟아올라 쉽게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스님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스님은 소말리아에 태어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폐기물들을 소말리아의 청정한 앞바다에 무단으로 투기하자 소말리아의 바다는 오염되고 가난한 소말리아 사람들은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소말리아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해적으로 변해갔다. 이런 팍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총을 들고 나섰지만 정작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 그저 어려서부터 해적질을 하며 그때 그때 충동과 본능에 따라 살아온 것이 전부였고, 그렇게 살다가 그 어린 소녀를 유린한 천하에 몹쓸 해적이 된다. 틱낫한 스님은 꿈을 깨어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스님은커녕 그 소녀를 유린한 해적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시를 쓴다.
'부디 나를 나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오!'
내일 내가 떠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오늘도 나는 여전히 도착하고 있기에.
깊이 보라: 나는 매 순간 도착하네.
봄 가지의 새싹이 되기 위해,
아직도 연약한 날개로
새로운 둥지에서 노래하는 법을 배우는 작은 새가 되기 위해,
꽃송이 속의 애벌레가 되기 위해,
돌 안에 스스로를 감추는 보석이 되기 위해.
나는 여전히 도착하네.
울고 웃기 위해,
두려워하고 희망을 품기 위해.
내 심장의 리듬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삶과 죽음이네.
나는 강물 위에서 탈바꿈하는 하루살이라네.
그리고 봄이 오면 때마침 찾아와 그 하루살이를 먹는 새라네.
나는 맑은 연못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라네.
그리고 가만히 다가와서 그 개구리를 먹이로 삼는 풀뱀이라네.
나는 뼈와 가죽만 남은 우간다의 어린이라네.
나의 다리는 대나무 막대기처럼 여위었네.
그리고 나는 우간다에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를 파는 상인이네.
나는 열두 살 소녀, 작은 배에 의지한 난민이네.
해적에게 짓밟힌 몸을 스스로 바다에 던졌네.
그리고 나는 해적이네.
내 마음은 아직도 이해하고 사랑할 줄을 모르네.
나는 손안에 많은 권력을 쥔 정치국 요원이네.
그리고 강제 노역장에서 서서히 죽어가며
인민들에게 무거운 빚을 갚아야 하는 그 사람이네.
나의 기쁨은 봄과 같네.
너무도 따사로워 모든 존재들에게서 꽃을 피우네.
나의 고통은 눈물의 강과 같네.
너무도 가득하여 네 개의 바다를 다 채우네.
부디 나를 나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오.
그래서 내가 모든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들을 수 있게,
그래서 내가 기쁨과 고통이 하나임을 볼 수 있게.
부디 나를 나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오.
그래서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내 마음의 문이, 자비의 문이 계속해서 열려 있도록.
-틱낫한-
지금의 내 모습은 인연 따라 내게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반응한 결과이며 다른 인연, 다른 환경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모두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과 선배들… 내가 읽은 책들과 내 눈에 멋져 보였던 그 누군가와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물이며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환경에서 만났다면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생각도 나의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을 ‘나’라고 믿는 믿음의 결정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내 생각을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멈추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가끔씩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불안과 걱정, 두려움 속에서 이런 생각이 내 삶을 좀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하는" 생각도 있지만 "일어나는" 생각도 있다.
돌아보면 내가 필요해서 하는 생각보다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보면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분들의 머릿속에는 "하는 생각보다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때의 '저절로'라는 말은 떠오른 이 생각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떠오른 생각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구름과 같다.
내 생각은 나의 실체가 아니기도 하지만, 내가 그 생각의 주체도 아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이렇게 절망스러운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이어지다가 결국 그 생각이 육체를 없애버리는 일이 자살이다.
정말 죽어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그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엔 '나는 무엇이 아닌가?' 세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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