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통증의 민낯을 만나는 길
통증기능분석학회 2023 추계 학술대회 강의록 : 만성통증 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10)
2)나는 무엇이 아닌가? 감정편.
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나의 감정을 나의 실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처럼 취급될 것이다. 데카르트의 후예들이 장악한 현대사회에서 그런 감정적인 사람은 가치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상당수의 행동은 감정이 결정한다.
다니엘 카너먼은 심리학자로써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유일무이하고 특이한 인물이다. 이제껏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경제적 선택을 한다고 가정한 경제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완전히 다르게 본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런 관점이 현실을 더 잘 반영한다고 인정한 셈이다. 실제 대부분의 소비는 감정을 움직여야 실행된다.
매킨토시라는 멋진 컴퓨터를 개발해 놓은 초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티브 잡스가 나락으로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로는 워낙 고사양의 컴퓨터를 만들어 놓은 탓에 그는 신문의 광고면을 온통 컴퓨터 성능에 대한 자랑과 소비자를 설득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채웠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처참한 실적을 받아 들고 자신이 설립한 애플의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해고된다. 그 후 그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인수하여 소비자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길을 걷게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몇 년 후 애플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다시 돌아온다. 그는 모든 제품의 성능에 집요하리만치 집착했으나 외형은 극단적인 단순미를 추구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없는 지금도 그의 철학을 그대로 계승하여 소비자들에게 감각적이며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마케팅을 한다. 스티브 잡스의 “Think Different!” 이 한 마디가 애플의 DNA가 되었다. 소비자의 감성을 붙잡은 애플은 엄청난 팬덤을 형성하며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별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단히 감정적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에 대한민국이 오르자 맥주집 주인들은 모든 손님들에게 공짜 맥주를 대접했고 처음 본 사람들도 어깨동무를 하며 시내를 몇 시간씩 돌아다녔다. 기분이 좋으면 안되는 것이 없고,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태도는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이토록 자신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감정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정규교육에서 감정을 이해하고 소중하게 가꾸는 법에 대해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부모님에게서도 배운 적이 없고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그저 감정에 끌려 다니면 안된다는 정도가 감정에 대해 들어본 전부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본인들은 시인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이 내 삶을 더욱 어둡게 만들 때, 나는 쉽게 그런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감정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든 피해보려 애를 쓰거나 그것도 안되면 외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만성통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들의 통증 이면에 부정적 감정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정작 나는 전문의가 되어 꽤 오랜 시간 환자들을 치료해 왔지만 감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책들을 통해 감정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
- 감정의 발견 (마크 브래킷)
- 이기적 감정 (랜돌프 M.네스)
-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 (데이비드 바드르)
- 스트레스의 힘 (켈리 맥고니걸)
- 도파민네이션 (애나 렘키)
- 감정이라는 세계 (레온 빈트샤이트)
-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 화, 이해하면 사라진다. (일묵 스님)
- 감정 와해기법 (현진 스님)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기독교적 전통이 몸에 배어 있다. 감정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심리학자들을 접하고 그들의 이론이 설득력있다고 느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중국과 한국, 일본의 선사스님들의 선불교적 가르침이 내가 환자들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감정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들이 겪는 고통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은 구름이다.
바람(나의 기대)이 불면 이리 저리 움직인다.
붙잡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감정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붙잡을 필요가 없고 막을 필요도 없다.
감정은 구름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기에 그저 흘러가도록 허용하고 감상하면 될 일이다.
물론, 말이 쉽지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은 오랜 기간 수행을 한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매일 조금씩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그 배경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 뒤에 가려진 나의 소중한 욕구를 살펴 보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감정과 생각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가 이해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 시간에는 '그럼 나는 무엇인가?' 에 대해 알아보자.
11/14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