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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Feb 17. 2024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나는 무엇인가?

만성통증의 민낯을 만나는 길


통증기능분석학회 2023 추계 학술대회 강의록 초록 : 만성통증 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11)


3. 세 번째 화살, 만성통증 증후군의 치료 "나는 무엇인가?"


3) 나는 과연 무엇인가?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나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자. 통증을 감각의 일부로만 보던 전통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감정의 일부로 파악하는 최신 뇌과학의 배경을 살펴 보자. 만성통증을 느끼는 나의 실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가)  고전적 통증 모델 :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기반한 생물학적인 통증 모델


세기의 천재인 데카르트로 인해 이성이 최고의 위치로 올라간 반면, 안타깝게도 몸은 기계가 되었다.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는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근대적 통증의 개념은 급성통증에는 유용하지만 현대사회에 만연한 만성통증에는 거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만성통증에는 기계적인 물리적 자극, 화학적으로 정제된 약물 등이 모두 일정한 정도만 효과가 있다. 수술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행해지는 이 모든 치료가 만성통증 증후군의 근본적 치유에는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대로 이성적 사유가 인간의 존재적 본질이라 치자. (데카르트의 생각은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할 때 무척이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의학, 뇌과학, 생물학, 심리학이 이토록 눈부시게 진보한 현대 사회에서 그의 주장은 점점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감정을 무시하고도 생각이 가능할까? 감정이 없는 생각이란 게 있기나 할까?


만일, 가능하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무런 느낌 없이 수 백만의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죽이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언어처럼 될 것이다.


"공식적인 언어(암트슈프라헤)를 하달 받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한다. 연민과 같은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고 이 일은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게 진행된다." 전범 재판에 회부된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생각이다.



나)  통합적 통증 모델 : 통증의 잃어버린 고리, 심리-사회-영적 통증 모델


감정이 빠진 생각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의 온도와 강도를 잘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아무도 감정에 대해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고 감정에 맞는 언어가 없기에 그저 단조로운 몇 가지 단어만 반복하여 쓰면서 사는 것 뿐이다. 실제로는 무지개의 다양한 색깔 스펙트럼처럼 수많은 감정이 우리의 뇌를 물들이고 있다. 그 감정을 알아채고 그 감정 뒤에 가려진 소중한 욕구를 알아볼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물리적 환경을 단번에 모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내면(뇌 속의 신경전달물질들 사이의 역학관계)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아름답게, 평화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에너지가 바뀐 후에야 외부의 물리적 환경도 좀 더 평화롭게 바뀐다.


나를 흘겨보며 지나갔던 상사의 눈초리 때문에 며칠간 찜찜하고 불쾌한 마음으로 업무를 겨우 겨우 해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내 뒤에 있던 선배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을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스토리를 지어낸 뒤 그 스토리가 사실이라고 믿은 결과, 나는 며칠간 늘 근무하는 똑같은 공간이 상당히 불편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진실을 알고 나서야 사무실의 환경은 다시 평화롭게 바뀌었다.


우리 모두는 객관적인 실체, 즉 외부환경을 바꾸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반의 반 만이라도 내면을 돌아보면 어떨까? 내 감정이라는 것이 그저 구름같이 흘러가는 일시적인 것이며, 나의 본질은 그 구름 뒤에 펼쳐진 무한한 하늘임을 안다면 어떨까? 나는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창공임을 알아차리면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좀 더 평화로운 삶을 살지 않을까?



의사가 만성통증 환자들의 내면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만성통증의 잃어버린 고리는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모든 의료전문가들이 만성통증 환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감정과 감정의 밑바닥에 깔린 채워지지 않은 욕구, 아물지 않은 상처와 인간 존재의 본질(영혼, 배경자아, 본래성품, 참나)에 대한 탐구를 담대히 하지 않는다면 이 아름다운 별에 사는 생명체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몸도, 생각도, 감정도 내가 아니라면 나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내 몸에서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그 지점을 바라보는 자이다.”


나의 실체를 이렇게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인간의 실체를 이렇게 바라보는 관점은 종교와 문화적 전통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기독교적 전통으로는 그리스도, 성령, 신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 등으로 불리고 불교적 전통으로는 불성, 본래면목, 마음(心),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적 전통으로는 도(道), 천명(天命)이라고 하며 퇴계 이황은 이런 성품을 경(敬)이라 하였다. 인도적 전통으로는 아트만, 브라흐마 등으로 불린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 현대 서양 영성계에서는 삶Life, 양자장, 우주에너지... 온갖 저마다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온갖 이름을 붙여 놓았다.


영혼을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나오는 영매술사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처럼 보지만 않는다면 ‘영혼’이라는 말도 괜찮다.(좀 더 세밀하게는 영靈:Spirit)과 혼魂:Soul or Mind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다만, 흔히 그렇게 통용되기에 쉽게 쓰는 것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성’이라는 말이 가장 이해하기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바라볼 때 다양한 민족들이 다양한 언어로 그 하늘을 표현하지만 실재는 하나 뿐이다. 각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다고 실제로 하늘이 여럿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본래 자리(본성本性)는 동물적 욕구와 개인적 욕망을 넘어서는 인류의 공통의식이다.


사실 ‘나’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생각으로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에서 떠올라 바라보면 이 실체는 대상으로써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정리하는 모든 것은 대상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아채는 주체가 따로 있고 그것은 객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실체는 ‘대상화되지 않는 알아차림’이다. 그러니 언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소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방편으로 쓰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교한 표현을 한다 하더라도 실체를 곧장 드러내는 말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자리를 표현할 때 언어가 끊어진 자리라는 의미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이 자리를 알아차리는 방식은 기존의 학문을 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앎이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분류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런 방식의 앎을 분별지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실체에 대한 접근은 분별심이 사라진 곳을 탐험하는 것이어서 무분별지라고 한다. 그러니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논리와 생각을 사용하므로 언제나 복잡해 보이고 언어가 오히려 실체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흔히 안목이 깊은 분들은 이 자리를 아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쉽다고 한다. 그러나 대상으로써 이해하려 들면 수십년 골방에 들어 앉아서 수행을 해도 여전히 은산철벽처럼 꽉 막혀 있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단지 지식(분별심)적인 이해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생각을 사용해서는 이 자리를 알 수 없음을 알차리는 것(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견성見性)라고 하였다. 이 때 보조국사가 말하는 본래 성품이 현대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배경자아(Background self)인 셈이다.



인간의 본래 자리를 동물적 욕구나 개인적 욕망의 차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자신을 물질 세계 안에 가두는 일이다. 동물적 욕구는 물리적 몸(physical body :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을 말하고 개인적 욕망은 화학적 몸(chemical body :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달물질들의 상호관계)을 말한다. 몸의 필요와 정신적 욕구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 따라 잠시 주어진 것이며 나의 실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의 본래 자리는 바로 이 배경자아의 자리이다. 배경자아를 알아차린 상태에서 인연따라, 사정에 따라 몸의 필요와 정신적 욕구를 알맞게 사용하는 것은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구별 소풍을 더욱 흔쾌하게 하는 일이다.


나는 깨달음을 위해 멀리 스승을 찾아간 적은 없지만 책을 통해 좋은 스승들을 만나고 가까운 곳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이 자리를 알아가는 데 명상과 깨달음, 뇌과학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나눠 준 책들은 아래와 같다.


- 명상하는 뇌 (대니얼 골먼, 리처드 데이비드슨)


- 고통의 비밀 (몬티 라이먼)


- 내면 소통 (김주환)


- 뇌, 생각의 출현 (박문호)


- 박문호 박사의 빅히스토리 공부 (박문호)


-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제럴드 에델만)


- 데카르트의 오류 (안토니오 다마지오)


- 내가 된다는 것 (아닐 세스)


-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매슈 워커)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


- 상처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싱어)


- 될 일은 된다. (마이클 싱어)


- 불교는 왜 진실인가? (로버트 라이트)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터 프랭클)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 무경계 (켄 윌버)


-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바이런 케이티)


- 기쁨의 천 가지 이름 (바이런 케이티)


-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최진석)


- 깨달음 이후 빨랫감 (잭 콘필드)


- 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 메타노이아 (김재호)


-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루퍼트 스파이라)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나의 본래자리에 다가가는지 현실적인 방법에 대해 알아 보자.




            12/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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