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통증의 민낯을 만나는 길
통증기능분석학회 2023 추계학술대회 강의록 초록 : 만성통증증후군, 세 번째 화살의 비밀 (8)
첫 번째 화살이 통각, 두 번째 화살이 통증, 통증이 3개월 이상 경과하면 만성통증, 세 번째 화살은 만성통증에 더하여 우울, 불안, 불면, 자존감 저하 등으로 삶이 파괴되는 상태인 만성통증 증후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화살의 과녁은 몸(경험자아, 물리적 실체), 두 번째 화살의 과녁은 정신(기억자아, 화학적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화살인 만성통증 증후군은 그 과녁이 무엇일까요? 과녁이 없다면 화살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성통증을 가진 사람 중 25%는 세 번째 화살이 과녁에 적중합니다. 세 번째 화살이 꽂히는 과녁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만성통증 증후군, 즉 고통의 열쇠입니다.
분명히 세 번째 화살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는 주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화살을 맞은 '나'는 누구일까요? 아니, 세 번째 화살의 과녁이 되어버린 '나'는 무엇일까요? (누구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합니다. 최대한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세 번째 화살의 과녁은 무엇이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적절합니다.)
때로는 무엇을 정의할 때 그 대상과 반대편에 있는 개념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기가 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흔히 오해되고 있는 '나는 무엇이 아닌가?'라는 질문의 첫 번째 답을 해 보겠습니다.
2) 나는 무엇이 아닌가? 몸 편.
내 몸이 나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① 체세포 vs 미생물 microbiome
나의 몸은 모두 약 40조 개의 체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나의 몸속에는 나의 체세포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다. 내가 무언가 의사결정을 할 때 투표를 한다면 미생물의 의사를 무시할 수 있을까? 미생물이 없으면 지금과 같이 진화한 내 몸도 없다. 2013년 Cell에 실린 논문(Gut-brain axis : how the microbiome influences anxiety and depression)에 따르면 미생물의 존재가 흔히 알고 있는 소화기 계통의 건강에만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인간이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인식을 가지기 시작한 초기의 스트레스 반응을 정상화하는데 미생물은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생물은 중추신경계와 자율신경계, 내분비와 면역계통에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최근 거듭 밝혀지고 있다. 실제 장 내의 미생물 분포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 그간 정확한 병의 기전을 밝히지 못했던 자가면역질환을 포함하는 다양한 만성질환의 원인으로 밝혀지고 있다. 개체수와 유전자의 입장을 놓고 본다면 체세포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 몸속에 있는 미생물이다. 어쩌면 우리 몸의 주인은 체세포가 아니라 미생물은 아닐까? 만일 투표로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결코 미생물의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몸속에서 매 순간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도 미생물의 영향을 받아서 분비된다. 따라서, 우리 몸의 대사과정과 기분, 행동양식에 미생물들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② 세포핵 vs 미토콘드리아
아무리 그래도 나의 체세포가 ‘나’에 더 가깝지 어떻게 세균과 같은 미생물의 무리를 ‘나’라는 존재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겠나? 그건 그저 ‘나’와 공생하는 관계 정도가 아닐까? 이런 시각에도 반박할 근거는 많지만 지면이 길어지므로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그러면 좋다. 체세포가 ‘나’라는 존재의 구성요소의 핵심이라고 치자. 뭐니 뭐니 해도 체세포의 핵심은 세포핵이다. 생명현상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자기 복제와 환경에 대응하여 다양한 대사작용을 총지휘하는 센터가 세포핵이다. 그런데 체세포의 세포핵이 온갖 단백질을 합성하고 유전자를 세대를 넘어 전달하는 것이 저 혼자의 힘으로 가능할까?
20억 년 전 진핵세포 안으로 들어온 내장배터리가 있다. 현생 인류의 체세포에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에너지원으로 TCA회로를 이용하여 고효율의 에너지를 세포에 공급하는 배터리 역할을 한다. 휴대폰 없는 배터리는 공허하고, 배터리 없는 휴대폰은 무용하다. 마찬가지로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세포는 효율적인 몸을 가질 수 없고 원시적인 단세포 형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체세포 안에 세포핵은 하나지만 미토콘드리아는 수백~수천 개가 있다. 건조중량을 기준으로 하면 세포질량의 절반 이상이 미토콘드리아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원핵세포에 가까우며 자체 유전자를 가지고 모계 유전을 한다.
체세포의 절대다수, 절대비중은 세포핵보다 미토콘드리아가 차지한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는 오래전 체세포 안으로 들어온 용병에 가까우며 에너지를 만드는 일 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 과연 체세포의 입장에서도 세포핵이 주인공인지 미토콘드리아가 주인공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게르만 용병이 로마를 차지하고 주인공이 되었듯 체세포도 미토콘드리아에게 점령을 당한 것은 아닐까?
③ 체성신경 vs 자율신경
체세포를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라고 보는 관점은 여전히 문제가 많고 그 중심이 세포핵인지, 미토콘드리아인지 애매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의지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고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주체여야만 한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나’에게 유리한 것은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여 선택하고 ‘나’에게 불리한 것은 피해야 한다. ‘나’의 장기적인 안녕을 위한 좋은 선택을 하는 주인공이 바로 ‘나’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생명을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은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언제나 가동되고 있다. 이것이 자율신경계이다. 호흡, 맥박, 체온과 같은 생명현상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은 전통적으로 ‘나’라고 알고 있던 그 개별적인 존재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다. 자율신경계가 이 모든 생명현상을 관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自律神經系라고 말할 때의 그 ‘自律’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그 ‘自’는 누구를 말하는가? 이것은 나와 네가 그리 다르지 않은 그 무엇이 아닌가? 이때의 ‘自(나)’는 어쩌면 개인의 특징이 아니라 인류공통의 그 무엇 아닌가? 모든 내부장기의 움직임과 생명의 끈을 붙들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자아가 아니라 인류공통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개별적 자아가 의지를 발휘하여 특정 행동을 하고,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작은 일에 불과하다. 실제 체성신경계가 의지를 발휘하여 개별적인 일을 위해 쓰는 에너지는 전체 소비되는 에너지의 1/3 정도에 불과하며 2/3는 자율신경계가 쓰고 있다.
‘나’를 내 몸이라고 보는 견해는 위의 세 가지 과학적 발견들을 감안하면 매우 불확실한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세포들이 며칠 내지 길어야 몇 년 안에 수명을 다하고 계속 교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 보면 몸은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나이에 따라 다른 모양, 다른 기능의 옷을 갈아입는 것과도 같다. 이런 사실을 곱씹어 보면 너무도 익숙한 개념이 사실은 근거가 매우 부족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내 몸이다!’라는 관념은 분명한 사실은 아니며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다음 시간에는 '내 생각이 나인가?' 대해 알아보자.
8/14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