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만나는 신
若欲求會 便會不得(약욕구회 변회부득)
但知不會 是卽見性(단지불회 시즉견성)
"만일 알려고 하면 결국 알지 못하게 된다.
다만 알 수 없음을 알아차리면 이것이 곧 깨달음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아름다운 통찰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뇌과학의 입장에서 이 법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앎
인간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기억을 저장해 갑니다. 문자가 만들어진 이후의 인간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기억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 인류 전체의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앞선 조상들과 다른 사람들의 지식까지 압축한 것을 개인의 뇌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이런 축적된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생물학적인 진화과정을 훨씬 뛰어넘는 진화를 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도구(문화)의 공진화입니다. 그 결과 인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압도적인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존과 번영을 향한 문화와의 공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의 길에서 죽여버린 신
제가 지은 신의 또 다른 별명이 '지금'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언제나 옳습니다.
'지금' 이대로 온전합니다.
'지금'을 외면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것은 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인류는 자기 안에 있는 신의 성품과 단절되었습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는 생존을 위해서는 유용했으나 행복을 위해서는 별 쓸모가 없을 때가 많죠. 때론 무척이나 해롭습니다.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사라진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는 모두 개념적인 것이며 인간이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라는 기초 위에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며, 미래는 현재의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무시하고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 후회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인 미래를 상상하고 기대하며 불안에 떨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이라는 신은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을 때 그 신은 관념 속에 갇힌 채 현실 속에서 활동할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제도와 문화에 갇힌 낡은 종교의 절대자는 관념 안에서만 절대자 노릇을 합니다. 현실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신의 개념에 대해 니체가 사망선고를 한 셈입니다.
저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힌 뇌가 '지금'을 외면하는 현상이 또 한 번 '신을 죽이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상태에서의 과거는 추억이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금을 그대로 바라보면 미래는 불안에 물든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삶을 다채롭게 펼쳐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입니다. 지금을 바탕으로 한 과거와 미래는 유용하지만 지금에서 떠난 과거와 미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후회와 불안의 대환장파티가 됩니다.
내 안의 본바탕을 알지 못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보조국사 지눌이 말한 '알지 못하는' 대상은 바로 기억에 물든 과거와 기대로 포장된 미래가 아닐까요?
기억은 '지금'의 감정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기대 또한 '지금'의 느낌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런데 기억과 기대의 토대가 되는 '지금'을 무시하고 어떻게 과거와 화해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허망한 생각은 아무리 해도 다다를 수 없는 목표입니다.
그러니 若欲求會 便會不得(약욕구회 변회부득)이라 할 밖에요.
쓸데없는 과거에 묶이지 말고 허망한 미래로 날아가지도 말고 오직 '지금' 이대로 온전한 줄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요, 성불입니다.
이 자리가 행복의 디딤돌이며 이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이고 인류의 본바탕입니다.
이 자리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본바탕, 자율신경을 다시 돌아봄
이 자리를 누군가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품이라 하고 누군가는 천명이나 도라고도 합니다. 참 나, 본래성품, 배경자아, 메타노이아… 문화적 배경에 따라 온갖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지 문화에 따라 언어가 다를 뿐 언어가 가리키는 본바탕, 그 실체가 다르지 않습니다. 아쉽게도 포장지만 다르고 내용물이 똑같은데도 포장지를 들고 싸우는 것이 바로 종교전쟁입니다. (실상, 대부분의 종교전쟁이 명목만 종교였을 뿐 대부분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싸움일 뿐이었습니다.)
다양한 표현이 가리키는 본바탕의 자리에는 개체적인 편협한 욕망이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자율신경이 이 본바탕에 가깝습니다. (백퍼센트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만…) 자율신경은 생명의 토대이며 자신의 개별적 의지를 벗어난 그 무엇입니다. 내 속에 나를 초월한 그 무엇이 나의 생명을 주관하고 있는 것이죠. 자율신경은 생명의 가장 깊은 속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율신경이 나의 의지와 만나는 접점이 바로 호흡입니다. 호흡은 자율신경과 체성신경(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신경망)이 만나는 공동경비구역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좌선을 하는 스님들이나 명상을 하는 많은 분들이 하는 것은 대부분 호흡을 관찰하면서 내면의 신성, 즉 자율신경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와 내 몸 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를 살게 하는 그 힘과 만나는 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물론, 다양한 명상방법이 있기에 호흡이 명상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기본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호흡을 안정시키지 못하면서 자율신경을 안정시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감각적 경험보다 더 가까운 것이 우리 내면의 신성이며 자율신경입니다.
어제는 저녁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처럼...
오늘은 인도의 아름다운 인사로 글을 맺습니다.
내 안의 신성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인사합니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