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19)

뾰족하고 차가운 진단도구들... 따뜻한 도구는 없을까?

by 김정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이야기 : 열 아홉번째 이야기.
- 뾰족하고 차가운 진단도구들이 너무 싫어... 따뜻한 도구는 없을까?



인턴들마다 특별히 선호하는 과가 있고 싫어하는 과도 있다. 주로 진단검사의학과나 영상의학과처럼 환자의 생명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과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담이 덜 하기에 대체로 선호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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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싫어하는 과는 성격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북새통을 쳐야 하는 응급실을 싫어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늘 피를 봐야 하는 외과를 특별히 힘들어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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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싫다기 보다는 힘들었던 과가 신장내과였다. 주로 만성 신부전 환자가 많이 입원해 있는데 콩팥기능이 떨어져 있다 보니 대체로 체력이 고갈된 분들이 많고 오랜 투병생활로 성격이 무척이나 날카로와져 있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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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것도 버거운 분들이라 동맥피를 뽑아서 산소농도와 혈액의 산성도를 체크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혈관상태가 좋을 리가 없다. 대부분 손목에서 피를 뽑는데 맥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다 벌써 여러 번 검사를 했던 곳이라 멍이 들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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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둥둥한 깡마른 환자의 손목을 잡을 때면 심장에 식초를 뿌린 듯 가슴이 쌔~하다. 이런 손목에서 또 피를 뽑아야 하다니... 어쩔 수 없지. 입술 끝에 힘을 주며 혈관을 찾는다.


사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얼마나 연습을 해왔던가! 인턴숙소에서 머리카락을 뽑아서 신문지 밑에 두고서 눈을 감고 신문지를 더듬어가며 수없이 찾아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파리한 입술, 움푹 들어간 눈에 앙상한 손목을 마주하면 그런 연습 따위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탁해진 환자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 마디 건넨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피 속에 산소가 부족할 까봐 확인하는 겁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한 번에 끝내도록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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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정을 설명하면 대부분의 환자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아 주신다. 정말 어려운 분들은 몇 번의 실패 후에 피를 겨우 뽑기도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를 악물고 참아주셨다.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다. 까탈스런 환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그렇게 아픈데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오랜 기간 아파온 분들의 그런 반응은 아주 정상적인 반응으로 생각되었다. "다음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실패없이 한 번만에 피를 뽑아야지."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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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과정을 참아 주신 아주머니 손을 잡으며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일어설라 치면 아주머니께서 "선생님이 수고하셨지요..." 힘겹게 한 마디 하신다. 의사가 힘들다 한들 아픈 사람만큼이야 할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서면서 어쩜 이렇게 내가 가진 진단도구들은 이렇게 뾰족하고 차갑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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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심장소리를 듣는 청진기 조차 차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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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돌 말아서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차갑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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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진단도구들 중에 따스한 것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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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내 손은 자타가 공인하는 따뜻한 손이다. 그래! 이 손으로도 많은 것을 진단할 수 있지. 열감이 있는지 만져보고 관절이 굳었는지, 경직은 없는지, 부종은 없는지, 뭉쳐진 근육이나 이상이 있는 인대 등등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지하게 많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어 지금껏 내 손을 가장 큰 진단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턴 당시에 차갑고 뾰족한 진단도구를 싫어했던 그 마음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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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손은 정말 많은 정보를 얻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전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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