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2025, 열린책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는 ⟪R.U.R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 ’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쓴 S.F 소설 작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을 문학에 녹여내어 체코 문학을 세계 문학 반열에 올린 작가이기도 하다.
1934년에 출간된 ⟪평범한 인생⟫은 ⟪호르두발⟫, ⟪별똥별⟫에 이은 “철학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은 단일한 존재가 아닌 다양한 주관적 관점(자아)들의 통합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포펠 씨가 어린 시절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의 부고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치료했던 의사는, 그가 죽음을 직감하고 작성한 자서전을 포펠 씨에게 건넨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공무원으로 친구를 기억하는 포펠 씨는, 그처럼 규칙적이고 평범한 사람도 죽는 걸 보니, 죽음도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서전을 챙겨간다.
고인의 기록은 자서전을 쓰게 된 이유부터 어린 시절, 김나지움 시절, 철도 공무원 생활, 은퇴까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단정하고 아름답던 기록은 한순간에 다양한 자아의 치열한 대화로 바뀐다. 각 내면의 대화를 통해 그는 인생은 객관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다양한 나’의 이야기의 총합임을 깨닫는다.
내면의 다양한 자아를 통해 자신의 여러 가지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가 겪지 못했지만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삶들을 발견한다. 그는 수백만 개의 배아 가운데 두 개의 가능성이 우연히 만든 그의 인생에 아찔함을 느낀다.
다른 배아가 만났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가능성을 지닌, 태어나지 못한 무수한 인생은 어떻게 된 걸까?
“우리 모두가 태어날 수는 없으니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운명들이 가능한, 태어나지 않은 형제들의 집합이 아닐까? 아마 그들 중 하나는 소목장이가 되고, 다른 사람은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또한 그들의 가능성들이기도 했다! 내가 단순히 내 삶으로 취했던 것이 우리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전에 살다가 죽은 우리와, 태어나지도 않았고 단지 존재의 가능성에 불과했던 우리의 삶 말이다. (......)
그건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총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인가!” 223쪽
그는 내면에서 부모, 조부모와 대화하며 선조에서 시작해 자신에게 이어진 역사와, 일찍 죽은 형이 살았다면 겪었을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 역시 무수히 많은 인생 중 하나를 살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이 자신이 놓친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한다. 마침내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은 가지지 못했던 가능성과 살아온 현실이 어우러진 복합체이며, 나와 너의 인생은 단절된 것이 아닌 ‘우리의 인생’ 임을 깨닫는다.
카렐 차페크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체코 공화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수호를 고수했다. 또한 전쟁과 획일화된 인간 사회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우리'라는 범주안에서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형제애를 문학에 담아냈다. 그중 ⟪평범한 인생⟫은 차페크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나’를 넘어 서로를 포용하는 ‘우리’가 될 때, 차페크는 우리의 인생은 평범하지만 찬란한 곳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차페크가 말하는 “평범한 인생”은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가까이에서 보면 조금씩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비슷한 우리의 인생을 찬미하는 표현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이 세상은 얼마나 늘어나는가!
세상이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고, 이렇게 찬란한 곳인지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