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맑음
여행 마지막 날.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에도 잠을 그다지 잘 자는 편이 아니지만 이렇게 밤을 샐 줄을 몰랐다.
덕분에 챙겨간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오늘도 커피 마시러 블루보틀에 갈까 하다가 가까운 스타벅스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거의 가지 않은 스타벅스를 여행지에서 찾는 건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가고자 했던 카페들은 애매한 시간에 문을 여니 어쩔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책도 읽고, 멍하니 있으니
어느새 상점들이 문 열 시간이 되어서 슬렁슬렁 가방을 챙겨 나갔다.
토요일 아침, 역이 평일 아침과는 다른 분위기로 북적였다.
다들 어디 놀러라도 가는지 얼굴이 반짝반짝,
손엔 큼직한 여행 가방이 하나씩.
체크아웃 전에 어제 눈여겨본 옷과 헤드폰을 다시 둘러보려고 쇼핑몰로 향했다.
피팅룸에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마음에 들어 살까 말까 고민한 카디건을 사고
요도바시 카메라 헤드폰 매장에 갔다.
사실 요즘 헤드폰 음향, 디자인이 브랜드마다 너무 비슷해서 예전처럼 다채로운 재미는 그다지 없었다.
운 좋게 밸런스 좋은 헤드폰 하나를 발견했는데 고심 끝에 포기, 정말 필요하면 사기로 했다.
어느덧 체크아웃시간이 다가와서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옷을 잘 개어 여행가방에 넣고 체크아웃 후 가방을 맡겼다.
이제 뭘 한담..
숙소를 나와 역 앞으로 나오니 그 사이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역 안에도 구름다리에도 광장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있었다.
정말 정신 놓고 있다간 같이 어디론가 휩쓸려 버릴 것 같은 느낌.
다들 어찌나 열심히 걸어가던지,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저렇게 맹렬히 걸어가는구나.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근처 광장에서 행사도 하고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모노를 입은 사람이 많아져서
가만히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디 가지도 않고 멍하니 사람구경하고 있는 내가 좀 이상하게 보였겠다.
츠타야에 들러 책구경을 하다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길에
오사카 엑스포 기념품 가게가 조금 한산한 걸 보았다.
마스코트가 여러모로 엑스포 자체보다 이슈였는데,
기념품 가게에 사람이 많아 놀랐었다.
역시 기념품과 한정판에 진심인 사람들.
궁금해서 줄을 서서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쇠고리 같은 작은 소품 거의 매진,
선물용 쿠키가 조금 남아 재미로 구매했다.
공항버스를 타러 갈 때는 토요일 오후라 고속도로가 막힐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한가해서 간사이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샤워실부터 찾아 개운하게 닦고 음료수를 마셨다.
한숨 돌리며 앉아 있으니
갑자기 미련이 몰려왔다.
첫째 날 느꼈던 답답함은 사라지고,
떠나는 게 뭐 이리 아쉽고 섭섭한지.
조금 더 돌아다닐걸,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볼걸.
괜히 덥고 비 온다, 귀찮다고 너무 아무것도 안 했다.
이렇게 샤워하고 물 마시고 쉬면서 다니면 되는데,
귀찮다고 미뤘던 순간들이 스쳐갔다.
에이, 그래도 테마파크도 잘 다녀왔고,
무엇을 했어도 후회는 항상 남는 법이니까.
내 방식대로, 느긋하고 게으르게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았나.
금세 수긍했다.
다음에 또 오게 되면 이번에 안 가본 곳에 가보자.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맹렬히 걷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