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중독자였구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창현 글/ 유희 그림, 사계절, 2018

by 이유해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 A.A)’ 에서 이름을 따온⟪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모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인터넷 연재만화를 엮은 단행본이다. 서로의 별명 외에 다른 정보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모임 구성원들이 다양한 독서 경험을 나눈다. 이창현, 유희 두 작가가 “정통파 개그 만화”라고 소개한 이 책은 과장된 표정과 리액션, 단순하고 빠른 전개, 그리고 말장난 등의 클래식한 개그 코드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전통파 개그 사이사이에 책을 고르는 법, 독서가들의 습관, 다양한 분야의 책 인용으로 독서의 즐거움에 서서히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조직폭력 집단에 잠입 수사 중인 ‘경찰’이 독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임의 ‘선생’, ‘사자’, ‘슈’, ‘고슬링’ 등 개성이 넘치는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경험을 나누며 다양한 독서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갈피에서 작가 소개글이나 목차, 서문으로 책을 파악하기도 하고, 주석이 많은 책을 읽을 때의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동시병행 독서법(일명 병렬독서)을 즐기고, 계속 책을 사느라 덧붙여진 제각각인 책장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부터 어딘가 추천 도서로 나올 법한 묵직한 인문학책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 새로운 정신의 조합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거부당하지 않는다.
교육과 문화에 대한 욕구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문주의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이 자유로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어떤 인종인지, 무슨 계급인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국적은 어딘지 묻지 않는다."
(22쪽,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


‘선생’은 모임에 처음 온 ‘경찰’을 개그만화에는 나오지 않을 법한 ⟪에라스무스 평전⟫으로 환영한다. 직업이나 본명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책 하나로 연결된 이 모임의 조건 없는 환대가 이 인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현실 언어로, 독자의 솔직한 감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 ‘판단력이 흐려진 노인네 이야기’나
‘질투에 눈먼 중년 아저씨 이야기’를 누가 좋아할까요?
‘우유부단한 유학파 왕자님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240쪽)


개그만화의 과장이라고 넘기기엔, 깔끔한 인물 소개에 피식 웃게 된다. 자칫 무겁게 느낄 수 있는 인문학 서적과 개그만화의 간결함과 유머가 적절히 섞여 책 읽기의 문턱을 낮추어 주고 책과의 거리감을 좁혀준다.


책 읽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책 읽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펼쳐보자. 제목을 보고 ‘나도 독서 중독자가 아닐까?’ 놀랐다면, 나의 독서 습관도 그려지는지 확인해 보자. 혹시 책장에 다 읽지 않은 책이나 밑줄과 메모가 가득한 책이 꽂혀있다면, 아니면 서문이나 표지 디자인에 집착하는 독자라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기꺼이 면죄부를 줄지도 모른다.


책의 후반부, ‘경찰’은 정체를 들켜 조직에게 제거당할 위기에 처한다.

책은 혼자 읽지만 결국엔 책과 책 읽기로 독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마이웨이인 독서 중독자들이 하나둘 모여 ‘경찰’을 도와준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책은 조용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엮어준다.


마지막에 '경찰'은 독서 중독자들에게 묻는다.

“요즘에는 무슨 책을 읽어요?”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이 책에서 나오는 중독 현상 중 몇 가지가 해당되나요?"


나는 해당사항이 꽤 많았다.

이런, 나도 중독자인가.



** 서평에 발췌된 부분은 웹툰 대사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일부는 원문 그대로 옮기고 일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줄 바꿈을 조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