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부서지기 쉬운 삶을 기어이 살아내는 힘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소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결점 없는 세상은 환상이다. 한강의 《흰》은 빛과 어둠이, 묵은 고통과 새로운 상처가 뒤섞인 공간이다. 그것은 단순히 표백된 깨끗함이 아니다. 온갖 더러움과 상처를 입고서도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기어이 지켜낸 숭고한 빛깔이다.
이 흰 세계를 산다는 것은,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를 걷는 일과 같다. 특별히 용감해서가 아니다. 멈출 수 없기에 내딛는다. 허공에 발을 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다.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그 주춤거림조차 삶의 일부다. 인생은 길을 잃고 헤매며 쌓아 올린 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태로운 길 위에서 질문을 던진다. 해답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공이 결코 비어 있지 않은 것처럼, 질문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변화시킨다.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이동시킨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시 '흰'이 있다. 흰색은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자, 잠재된 색채들이 끓어오르는 역동적인 상태다. 마치 '0'과 같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시작점이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결국 ‘흰’은 순수해서 고귀한 것이 아니다. 숱한 고통과 잡다한 얼룩을 다 받아들이면서도 끝끝내 더럽혀질 수 없는 본질을 지켰기에 고귀하다. 그러므로 ‘흰 것’을 건넨다는 행위는 단순히 깨끗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 입은 이 삶을, 훼손되었으나 결코 파괴되지 않은 영혼을 건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