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문장

속도는 의미를 지운다, 의도적인 멈춤의 기록

by 아무것도아닌





속도는 때로 의미를 지운다. 너무 빨리 달리면 풍경이 뭉개지듯 글도 그렇다. 《인생 문장》은 작정하고 읽는 속도에 제동을 건다. 자유롭게 써내려간 것 같지만 꽉 들어찬 밀도로, 숨을 고르고 오래 응시해야만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는 의도적인 멈춤의 기록이다.



표범이 사원으로 들어와 제물로 바친 술을 찌끼까지 남김없이 마셔 버린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마침내 이런 일이 있을 것까지 미리 고려하여 의식의 일부로 삼는다.

_ 프란츠 카츠카,<사원의 표범>



솔직히 고백하자면, 첫 장을 넘길 때는 당혹스러웠다. 거장들이 꼽은 최고의 문장이라는데, 내 얄팍하고 일반화된 사고로는 그 깊이가 단번에 가늠되지 않았다. 그들이 느꼈다는 전율이 겉도는 기분. 행간에 숨겨진 견고한 함의를 읽어내기엔 내 그릇이 턱없이 부족함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책은 문장 뒤에 숨은 맥락을 가감 없이 풀어놓는다. 왜 이 한 줄에 매혹되었는지, 그것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원했는지. 그 치열한 고백을 따라가다 보면, 낯설었던 글자들이 조금씩 읽히고, 담긴다.


엠마 도노휴의 고백이 그랬다. 아일랜드에서 성 정체성을 숨죽여 고민하던 시절, 그녀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방패 삼아 세상과 맞섰다. "내가 괴물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밀리 디킨슨처럼 될 수는 있잖아." 그녀에게 문학은 교양이나 취미가 아니라, 숨 막히는 현실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호흡기였다. 클레어 메수드 역시 "우리가 글로 적은 것이 우리 폐허를 떠받치는 조각들"이라 말한다. 삶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 우리를 붙잡아주는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닐지 모른다. 우연히 마주친 문장 하나가 단단한 삶의 버팀목이 된다. 에이미 벤더가 시를 암기하며 느꼈다는 "카페인에 취한 기분" 역시, 문장이 단순한 글자를 넘어 삶을 버티게 하는 절대적인 힘이 되는 순간을 증명한다.



무의미는 '의미가 아닌 것'이 아니라 의미의 가장자리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실은 의미가 가득하다. 그러면서 보편적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 무의미다.



삶이 고통처럼 느껴질 때 필요한 건 느슨한 위로가 아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단단하게 벼려진 문장 하나다. 이 책은 문학이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 보게 하는 도구임을 증명한다. 지금 나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문장은 과연 무엇인가.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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