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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Aug 13. 2016

터널, 정말 재밌는데 웃을 수가 없는

우리에게 지겨워할 권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본 영화의 관람가 등급을 참고하시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나는 그 날 이후, 배를 잘 못 탄다. 잘 못 타는 정도가 아니고 배라는 이동 수단은 아예 선택지에 없다는 표현이 맞겠다. 솔직히 유람선조차 안 탄다. 근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는, 자꾸 천장을 올려다본다.

조만간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다리를 못 건너고,
지하철도 못 타게 될까?








엄청 재밌는데 웃을 수가 없다, 젠장.
옛날에는 영화는 그냥 영화였다.

"헐 무섭..."
"야, 영화잖아~ 다 꾸며낸 거!"
"그치? 하긴, 다 거짓부렁 저거!" (쎈 척)

뭐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요새는 이런 대화가 가능하던가? 음.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터널'은 끝까지 갔던 김성훈 감독의 화려한 복귀가 눈에 띄는, 분명한 상업영화다. 무려 12세 관람가라는 귀중한 관람등급까지 등에 업은. (지금은 방학 시즌이고 틴에이지 티켓파워는 꽤 무시할 수가 없다. 곡성의 최종 스코어를 보라..... 부들부들)

김 감독의 영화를 단 한 편, 단 한 번, 꽉 들어찬 주말 극장의 시제석에서 봤지만 지독한 블랙코미디에 뜬금없이 빵 터져가며 진짜 재밌게 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때까지는 내게 있어 '영화는 영화'였던게 분명하다. 그땐 내가 이선균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맘이 편했고, 그래서 재밌었고, 마음껏 웃었다. 와하하하 졸라 웃겨.


연기를 졸라 잘하는 이선균사마



터널도 완벽하게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꽤 나온다. 정상 범주에 들어가는 이 시대의 현대인이라면 반드시 웃을만한 아주 재미난 씬과 대사가 초반부에 대놓고 포진되어 있다. 막,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정도다. '겁나 재밌죠? 지금이라도 웃어두세요.'

... 근데 왜 전 웃을 수가 없는 거죠. 웃고 싶어요, 안 선생님...

모두가 예를 외칠 때 '아니오'를 부르짖던 왕년의 유오성처럼 극장에서 나 홀로 웃지 못했다. 영화를 볼 때는 내 웃음에 자꾸 걸리는 브레이크- 그게 뭔지 잘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자꾸 내가 터널 안에 있는 기아자동차 하도대리점 이정수 씨가 된 것 같아서였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웃어요.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 생활고.
터널에는 2016년 현재, 한국의 재난 영화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설정은 다 나온다. 체크리스트를 작성해두고 꼼꼼하게 찍다가 '아차차 제일 중요한 정치인들 생색내기 쑈가 빠졌군. 체크체크!'라고 한 것처럼. 나중에 할매가 되어 내 손주들에게 '이 할매가 젊었을 때는 말이다~' 말하기엔 목이 너무 아플 때 이 영화를 틀어주면 될 정도다. (내가 썼지만 진짜 적절하다)


그중에서 제일 내게 와 닿았던 것은 젊은 청춘 민아의 서사이다. 엄마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통화에서 그녀는 사랑한다 던가, 여기서 나가면 뭔가를 해보겠다던가 하는 말 대신 이런 말을 한다. '회사에 말 좀 잘해줘. 신입사원 연수, 꼭 갈 수 있다고.'


바로 눈 앞에 있는 경험 해보지 못한 어렴풋한 죽음보다, 다시 주어질지 말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일상의 공포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삶. 1분 있다가 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고통보다, 다시 써야 될 자소서가 더 끔찍한 인생. 난 이걸 '생활고'라는 표현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나라고 다를까. 비록 눈앞에 바위는 내 몸 위로 내려앉고, 물 한 방울 못 먹은 지 40시간은 됐지만 전화는 이렇게 하겠지.

'네, 팀장님 전데요. 아마 다음 주에는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책상은 빼시면 안돼요.


 





그리고, 하정우 (야광봉)
하정우를 주목하게 된 건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추격자의 지영민으로 그를 만났을 때부터다. 살다 살다 그렇게 진짜같이 연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고, 그래서 너무 기분이 나빴던 나머지 '저 사람 나오는 거 이제 안 볼래...'했을 정도다. (치.. 칭찬입니다)

그랬던 4885가 지금의 하정우가 되었고,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난 그를 딱 99퍼센트만 좋아했다. 그 이유는 100을 넘어 120까지 달려가고야 마는 그의 독자적인 연기 영역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즉, 내 기준으로 하정우의 연기는 하늘에 닿다 못해 성층권을 뚫어버린 느낌인데, 이는 스크린에서 혼자 나올 때는 너무 빛이 나지만 다른 배우와의 앙상블 장면에서조차 혼자만 보인다는 뜻이다. 에너지를 나눌 때는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너무 연기에 정진하다 보니 '범인'들의 연기와는 결을 같이하지 못할 정도로 아예 레이어가 분리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너무 잘해도 문제다. 나눌 수 있으면 모 배우들과 좀 나누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그가 터널 안에 갇힌 이정수가 된 걸 보면서 그냥 나는 되지도 않는 평가질을 집어치고 그를 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대 가시는 길 어디라도, 가시밭길이라도 제가 따라갈게요. 영원한 발닦개가 되겠습니다.

이런 성스런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다양한 '놀라는' 장면들 때문이다.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를 전공했고, 극작을 알기 때문에 일반인처럼 놀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가 놀라는 것처럼 어벙하게 놀라지 않고 멋있게 놀란다. 다들 아시잖아요 그 표정.


그런데, 하정우는 해낸다. '진짜' 놀라는 표정을, 스크린에 꽉 차게 보여준다.


'나 놀란다-나 놀라는 연기 한다- 캬, 지금 엄청 비장했다! 나 놀랐다!' 하는 표정이 아니고, 지금 내 앞에 난데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보는 얼굴을, 그는 결국 또 찾았다.


하와이 피스톨이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그 얼굴을.

당신의 발닦개로 허락해 주소서



그렇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원탑만 할 수 있는 배우도 흔치는 않잖은가? 투탑 쓰리탑에서 빛나는 배우는 그걸 찍으면 된다. 그리고 하정우는 원탑을 찍으면 된다. 가장 잘하고, 또 그만이 할 수 있는 거. 그거면 됐다.



마지막으로, 감히 지겨울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택시를 타고 광화문 부근을 달리다 보면 약 95퍼센트의 높은 확률로 들려오던 기사님들의 공통적인 레퍼토리가 있다.

'이제 그만들 해야지. 사람들도 지겨워하잖아.'

영화 속 어떤 정치인도 정수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국민들도 다 지쳤어요. 65%가 넘는 사람들이 그만하랍니다.'


음?

그만하고, 지겨워하고, 지칠 권리가 우리에게 있던가? 언제부터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존재였지?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우리가 그렇지 못해 마음 아픈 이들과 마음 아플 수 있는 기회조차 하늘에 빼앗겨 버린 그들에게 어떻게 지겹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지?

그만하면, 이제 그만 잊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되어도 남은 우리는 그냥 잊으면 되는 건가요?







이정수는 영화라서 터널에서 나왔지만,
아이들은 현실이라서 그러지 못했다.

내가 김대경 대장이 아니어서 미안하고,
또다시, 미안하고
새롭게, 미안하다.


나는, 아이들이, 지겨워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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