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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Dec 30. 2018

그사세, 그들이 살던 세상

그리고 10년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참 우습다.

어제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딱히 기억이 안 나는데,

10년 전에 본 드라마의 대사는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게 참, 우습다.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가는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이래저래 바쁘게 살다 보면 (별 영양가는 없지만…) 드라마를 챙겨보며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름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던 드라마 키드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슬프기도 하지만.



그런데 요새 무려 두 개나! 챙겨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시작 시기도 비슷한 이 드라마들을 엊저녁에 하나씩 번갈아 가며 보던 중에 갑작스런 기사감이 들었다.

 


뭐지, 이 느낌? 헐….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의 주준영은 나이 차가 꽤 나는 연하남과 고군분투 중이었고 범생이 정지오는 그라나다에서 AR 드라마를 하나 찍고 있더라는. 헐. 대박적. (심지어 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그때랑 너무 비슷함)

 


햐.. 그러고 보니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이 방송되던 계절도 딱 이 맘 때였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돌이켜보니, 10년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주준영과 정지오를 처음 만난 게 바로 10년 전 겨울, 지금.

 


그래서 내 인생 드라마 10주년 기념으로 오랜만에 글을 써보고자 펜을.. 아니 키보드를 꺼냈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드라마인지, 주준영과 정지오가 나이만 먹은 아이였던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되새겨 보고 싶어서.

 





내 주준영과 정지오.





  

 


 

10년 전, 그들이 살던 그리고 내가 살던 세상.

10년 전의 나는, 그러니까 나는…. 세상을 다 안다고 믿었던 애송이인 나는, 가열차게 연애 중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정말 지멋대로 였고, 그때 나의 연인에게 이제 와서 미안하긴 하다, 싶지만 뭐 그때 내 연애는 그랬다. 뭐랄까,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이 ‘나’만 있는 연애였다고 할까.

 


한 번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볼일 따윈 없는 거고, ‘재회’라는 말을 세상 가장 ‘극혐’하며, 헤어진 마당에 전화하고 울고불고 질척거리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던 자기만의 세계에 살던 아이.

 


그런 ‘아이’에게 주준영과 정지오가 찾아왔고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으른의 연애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나의 작은 세계가 그들에 의해 그리고 노희경 작가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정말 끝내자고 이러는 거야? 아님 애들 사랑싸움처럼 좋다, 싫다 하면서 줄다리기하는 건데, 내가 말려드는 거야?... 지금 이 순간에 대본이 눈에 들어올 만큼 니가 그렇게 잘났니?!

 



 

드라마에서 정지오는 주준영에게 갑자기 이별을 고한다. 물론 정말 ‘갑자기’는 아니지만, 주준영에게는 갑작스런 이별통보였다. 드라마를 보던 나에게도 그건 너무 일방적인 이별통보였고 그날 밤새도록 뒤척이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안 됐다. 왜 정지오가 주준영에게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말 사랑한다면 헤어질 리가 없다’는 순진한 명제를 굳건히 믿던 어린아이에게 그 남자의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역설이었던 거다.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공식을 대입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마주한 어느 천재 수학자의 절망 같았다고나 할까.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주준영보다 더 펑펑 울고 난 다음날, 내가 아는 모든 XY 염색체를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정지오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모범답안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들의 반응은 아무 준비도 안된 나에게 너무 큰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한 뼘 정도는 더 클 수 있는 성장 촉진제였지만.

 



...무려, 100퍼센트였다! 별로 큰 캠퍼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라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회에서 내 질문에 답한 모든 남자가!! 정지오를 이해한다고 했다. 처음엔 내가 너무 생략해서 말했나 싶어서 주준영 입장에서 좀 더 유리하게, 길게 말해보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야, 당연히 헤어지자고 하지.’

 


와,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작은 유리컵이 산산조각 나던 기분은, 내 세상 말고 겁나 넓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가장 가까운 사람들 입에서 들었던 그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보다 더 강렬하고, 처음으로 통보받았던 이별의 말보다 확실히 더, 뼈아팠다.

 


내가 모르던 세계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잘. 모르지만.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





그리고 10년, 그들과 내가 사는 세상.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20대 후반의 주준영과 30대 초반이었던 정지오는, 각각 30대를 흘려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는 주준영과 40대를 맞이하는 그 만의 노력을 하는 정지오가 되어 있겠지.. 앞으로의 인생을 준비하는 그들은, 과연 함께일까?

 


프랭클리 스피킹, 그들이 “결혼” 같은 걸 했을 것 같지가 않다. 정말 긍정적으로 본다면, 아직도 지 잘났다고 지지고 볶고 싸우다 갑자기 입 맞추고 화해하는 10년째 연애 중 일수도 있다. 그치만 아마 그들은 각자 서로의 세상을 살고 있을 것 같다. 주준영이 아직까지 그 드라마국에 있다면 우리가 아는 주준영이 아니고, 정지오가 드라마를 만들고 있지 않다면 이 또한 우리가 아는 그 정지오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호텔 사장이 되거나 AR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됐을까?

10년 전 뼈아픈 경험을 양분 삼아 완벽한 으른의 연애를 하고 있다!!

고 당당히 말하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은데,

젠장, 난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 보인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또다시 “완벽”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동안 겪어온,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웬만한 경우의 수와 위험요소는 모두 통제하며 관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지쟈스..) 동네 사고뭉치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박으며 터득한 ‘나만의 시크릿 노트’를 바탕으로 이제 진짜 시행착오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조금 큰 유리 대야 정도였나 보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가.



이제는,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한다.

옘뱅,

내 맘대로 되는 게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데 뭐.

 



다시 2008년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 증말, 연애는 학습이란 게 없다.


정확히 10년 만에 ‘정지오 쇼크’를 복기하며 또다시 나의 유리를 깨어보려고 한다.



쿵. 쿵. 깨져라 좀.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인생 드라마'가 있다는 것의 의미.

현실과 달리 드라마 속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선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가끔 술에 취하면 뭔가를 막 하고 싶어 지는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이건 사람마다 다 다른데, 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 같은 애는, 그사세가 그렇게 보고 싶어 진다. DVD 타이틀이 돌아갈 때 들리는 그 소음이 주는 설렘이란. 참, 이미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본 드라마인데, 어떻게 볼 때마다 새로울 수가 있을까?

 



얼마 전 (만취하여) 10년 만에 정주행을 시작하는데, 이게 내가 지금까지 본 드라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정지오가 왜 주준영에게 헤어지자고 했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이해가 되려고 했다. 분명 스무 살 시절에는 내가 주준영이라도 된 냥 너무 분하고 하나도 이해가 안 됐었는데. 나이를 영 그냥 먹은 건 아닌가 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드라마를 다 봤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또다시 10년 후, 그 드라마의 그들이, 그리고 ‘내’가 너무 기대된다.

 









Ps. 그리고 그 아이는.

그사세를 만난 후 그 아이는, 한 번 헤어져놓고 두 번 세번 만나며, '재회'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네 생각 하며, 헤어진 마당에 울고 불고 질척거리는 새 나라의 으른으로 무럭무럭 컸다고 합니다...







Ps2. 주연 배우들이 실제로 연애를 했다는 점 또한, 이 드라마의   킬링포인트!









준영아. 내가 너한텐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그래서 너한테는 드라마가 아름답게 사는 삶의 방식이겠지만, 솔직히 나한테는 드라마는 힘든 현실에 대한 도피다. 내가 언젠가 너에게 그 말을 할 용기가 생길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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