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한뼘의年記
8월이 9월이 될 때, 영국은 비를 뿌렸다 곧 해를 비췄다 다시 비를 뿌렸다 하며 형광등처럼 가을을 불러들인다. 갓 이사한 아파트의 중앙난방이 언제 시작될지 궁금해하면서, 올해 마지막일 것이 확실한 높은 해 아래를 걷고 장을 보며 다음 주 식단을 짰다.
궁금해하지도, 걷지도, 먹지도 않는 사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서.
뜨겁고 습한 인천의 (그리고 나주, 강진의) 공기가 숨을 막았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음은 그제서야 남쪽으로 주저앉았다.
*
네가 아직 나보다 작았던 시절, 네 손을 잡고 방방이를 타고 뽑기도 먹자며 나섰지. 주머니에 모처럼 동전을 가득 채우고.
그러나 90년대 그 석관동 골목은 줄서기도 번호표도 없는 야생. 바글바글한 어린이들을 뚫고 뽑기 할머니에게 돈을 내며 저요, 하고 외쳐야 했는데, 불가능한 일 - 지금도 절대 불가능한 일.
몸집도 목소리도 작은 우린 얌전히 기다리다 결국 무질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지. 우리보다 늦게 온 아이들이 튀어 오르고 소리지르며 흔들어대는 골목을 빠져나왔어. 골목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었지. 아마 지금도. 적어도 난 지금도.
조용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좌초될 일을 도모한 것, 늠름한 누나상의 좌절, 무거운 한쪽 주머니.
돌아오는 길에 넌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고 우린 원래처럼 집에서 놀았지. 플라스틱 칼, 게임기, 만화 그리기.
내 머리카락, 엄마의 머리카락, 때론 제 머리카락을 손에 쥐어야만 잠들던 너. 매일 다른 꿈을 꾸는 조그만 얼굴.
넌 무럭무럭 자랐지. 많이는 아니지만. 나처럼.
그리고 너의 청춘은.. 아주 어려운 토양에 심겼지. 난 내키는 대로 가지를 뻗고선 가누지 못하겠단 핑계로 네게 한 뼘의 부목도 잘라주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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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면 나아질까, 마흔이 되면 달라질까. 믿음도 없이 바라는 것 말곤 한 게 없으니, 무얼 기대했는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않은지, 알 리가 없다.
빈손을 흔들다 멈추는 몸이 머릿속에. 특수한 절차가 필요했다던 몸이 귓가에. 바람에 날리던 몸은 두 눈에. 남기지 않은 말 대신 그 몸에 대해 언제나 또렷이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네가 겪은 고통에 대해선 조금도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건 나 자신의 것뿐이다. 너의 몸 위로 무너진 사람 위로 몸을 포개면서도 내가 아는 건 내 것뿐.
나는 내가 아는 것으로 흠뻑 젖었고, 그것만 가지고도 어쩔 줄 몰랐다. 고작 잠기지 않으려고.
부끄럽게, 널 담기에 비좁은 마음으로 도달한 40년. 모르는 것들을 껴안고서 하루에 하루씩 시간과 발맞추게 될까. 새순이 돋는 소리가 귓등을 두드리는 날, 장맛비가 모든 것에 닿는 날,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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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40년에 영영 도달할 수 없게 된 생명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여기서, 내일을 되풀이해 걸어야 할 모든 걸음과 뒷걸음이 걸을 만하길. 모르는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 한 뼘의 마음을 줄 수 있다면. 또 깜빡, 깜빡. 해가 나고, 비가 오고, 어느새 봄으로 가득 채워진 순간도 이따금 만나길.
하늘의 별을 향해 길게 손을 뻗으려 한 사람아, 수면에 비친 별을 품에 가두려 한 사람아.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별에게 천천히 걸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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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정말.
사진: Carnaby Street, London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