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일상으로 들어오다.

삼춘(이모)들과 함께 하는 재미난 일상

by 이지원

몸의 곳곳에 염증이 생겼다. 염증을 방치하니 내 몸이 스스로 치유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무심히 내 할 일을 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의 몸은 나름의 자가 치유로 통증은 없어졌으나, 그 자리에 흉터를 남겼다. 그리고 나는 또 무심히 내 할 일을 하였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무심했던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흉터가 볼록하고 튀어나와 건강한 살들을 잡아먹었다. 그렇게 자신의 면적을 넓혀갔다. 그제야 나는 이 상처를 바라보게 되었다. 시간을 들여 정성껏 관심을 가지니, 이제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말은 변명처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흉터가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무심했던 흔적들을 도려내고 꿰매기로 했다. 그렇게 성형외과로 가게 되었다. 수술 후 입원이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과 입원 일자를 잡고 이후 일상을 잠시 중단하고 비일상에 들어왔다. 넓은 대지의 너그러운 품 가운데에 쏙 들어와 있는 병원을 보니 세상의 번잡함과 구분되어질 좋은 요양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의 병실은 203호, 4인실. 원무과에서 1인실, 2인실, 4인실 중 어느 것을 택하겠냐는 질문에 엄마는 나를 살피며 가격을 묻고는 2인실을 이야기하며 말 끝을 흐린다. 나는 1인실을 택하면 돈이 아깝고, 2인실은 타인과 함께 지내는 것에서는 4인실과 다를 게 없어 보여 4인실을 골랐다. 좋은 결정이길 바라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을 들쳐 매고 씩씩하게 병실에 들어간다.

정사각형을 십자(+)로 4 분할했을 때 좌하단에 위치한 자리가 내 자리였다. 세면대와 거울이 옆에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수술 관련 동의서를 작성하고 다음 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왕년에 한 미모 하셨을 것 같은 이모가 들어오셨다. 오셔서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여기 온 지 오래되었어?"였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늘 입원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모가 건넨 질문의 의도는 '이 병실'에 언제 들어와 있었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휴대폰이 없어졌기에 나를 의심하며 건넨 질문이었다.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번 쓱 흘겨보며 휴대폰을 찾는 모습을 말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 상단에 위치한 본인 침대의 이불속에서 휴대폰을 찾는 순간 나를 보는 이모의 눈은 의심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신기했다. 이모는 찾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나는 산소통에서 죽을 뻔했는데 너는 어디냐!"라며 호통을 치고 산소통에서 죽을 뻔했다는 단어를 두 세 마디 더 반복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10분 뒤 다른 이모가 링거대를 질질 끌며 천진난만하게 들어오셨다. 이모가 향하는 침대에 '김 O량'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 김량이 이모라며 마음속에 새겼다. 앞으로 3일간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하기에 마음속으로 이모들에게 호칭을 정해두었다. 나의 이름 또한 개인정보 때문에 '이 O원'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이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며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김량이 이모 침대는 내 옆자리여서 우하단에 위치하였다. 짝지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나도 김량이 이모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자주 마주쳤다.

천진하게 들어오시는 김량이 이모에게 나를 도둑 보듯이 보았던 그 이모는 성질을 부려댔다. 이모의 불평의 요점은 "산소통에서 자신은 너무 힘들었는데, 너는 뭐 하고 이제야 들어오냐 같은 병실 식구끼리 걱정도 안 되냐!"였다. 나는 앞으로 이 이모를 '공주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김량이 이모는 또 천진하게 웃으시면서 "밖에 날씨가 좋아서 바람쐬고왔주게~!" 라며 받아치며 흐지부지 넘기는 듯했다. 수술 전 긴장을 완화해 주는 약을 먹은 탓에 몽롱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이모들의 음성에 마치 '!'와 '~'이 보이는 것 같았다.


수술이 끝나니 병실 침대였다. 얕은 잠결에 이모들의 실랑이 소리가 들린다. 나를 깨우냐 마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공주 이모는 마취약이 빨리 몸에서 빠져나가야 되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자면 안 된다고 하고, 김량이 이모는 아까 의사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졸리면 좀 더 자도 괜찮다는 입장이었다. 이 목소리들은 분명 내게 닿고 있지만, 내 몸은 일어날 생각 조차 하지 않는다. 눈은 돌덩이처럼 무겁고 이불은 구름처럼 포근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지금 누군가의 걱정과 정겨움 속에서 쉬고 있다는 생각에 그 말소리는 나에게 자장가가 되었다.


눈을 떠보니 새로운 이모가 오셨다. 여유로웠던 나의 입원과는 다르게 그 이모의 병실 입장은 꽤나 긴박하게 이루어졌다. 버스를 타다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나는 상태로 아들과 함께 병실에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셨다. 응급처치를 받으시고 돌아와 나의 맞은편 침대인 좌상단에 자리를 잡으신 이모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시더니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조금 괜찮아지셨냐는 나의 물음에 이모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애인 있어~?"라고 답하신다. 그 이후로 나를 며느리 삼고 싶다며 아들의 키는 180이 넘고 집도 지하 3층 짜리 집에 혼자 살고 있으며, 아무것도 없이 몸만 오면 된다, 부모님한테도 잘하는 착한 아들이라고 한다. 여러 장점 중 아들의 키가 180이라는 점을 제일 강조하셨는데 밑줄 쫙 쳐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리액션을 기대하는 이모의 눈빛은 식은땀이 절로 나는 대목이다. 3일 입원하면서 하루에 한 번씩 거치는 맞선에 대한 제안은 줄다리기나 창과 방패 같은 느낌이 아니려야 아닐 수가 없다. 애인이 있다는 나의 말에 골키퍼가 있다고 해서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라며 며느리 찾는 일에 열정을 보이셨던 이모는 결국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현 애인의 키를 듣고 나서야 "내가 졌다."라는 말로 맞선 제안은 끝이 났다. 이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모의 링거대에 걸려 있는 드레싱 봉투를 보니 다른 환자와는 다르게 이름 전체가 써져 있었고, '복희'라는 이름에 눈길이 간다. 이모는 '복을 지닌 고운 여인'이기에 언젠가는 바람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도한다.


불이 꺼져 있던 203호는 입구와 창가의 불이 환하게 켜지고, 병실의 침대는 가득 찼다.

첫날밤부터 불협화음이 들린다. 복희 이모의 코골이 때문. 복희 이모 바로 옆에 자리한 공주 이모는 복희 이모 때문에 잠을 못 잤다며 다음날 아침 복희 이모에게 벼락같은 일침들을 가한다. "너 왜 이렇게 여자가 추잡하게 코를 고냐! 시끄럽다고 계속 이야기해도 안 듣네 진짜." 잠에 들기 전에는 우아한 말투로 품위를 지키는 복희 이모는 공주 이모의 볼멘소리에도 "어머.. 내가 자는 동안 피해를 준거 같네 미안해~"라며 등을 돌려 사뿐사뿐 병실 밖을 걸어 나갈 뿐이다. 그날 밤 공주 이모는 외박을 하겠다며 번거로운 외출 절차를 후다닥 해치우고 짐을 챙겨 남편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김량이 이모는 공주 이모가 떠나자마자 복희 이모와 공주 이모의 침대를 번갈아 가리키며 나에게 말한다. "저쪽의 코골이보다 밤새 시끄럽다며 왔다 갔다, 허리 아프다며 이쪽 침대와 보조 침대를 왔다 갔다, 잠들라 하면 왔다 갔다 한 저쪽 언니가 더 시끄러워 잠을 못자주게." 원래 자기가 더 시끄러운 줄 모르고 남한테 뭐라 그런다며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공주 이모의 모순을 지적했다.


나는 이모들의 감정적인 교류에 끼지 못할 만큼 나이 차이가 났기에, 내 행동은 대부분 너그러이 이해받았다. 마치 나와 같은 또래 무리에 한 아기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똥을 싸도, 누구 하나 기분 상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랄까. 덕분에 나는 이 여인들의 상호작용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마치 연극을 보듯 관찰할 수 있었다. 한 발짝 물러나 있으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고, 불안하거나 분노로 이성이 흔들리는 일도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형의 어떤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이날 오후 나는 김량이 이모와 함께 병원 주변을 거닐었다. 김량이 이모는 취미로 축구와 산악활동을 즐겨하시는 도전적인 여성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넓은 대지에 시선을 놓아둔 채로 어렸을 적 촌에서 태어나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밭에서 과일들을 서리하고 선생님께 혼났던 일화, 버스를 타고 등교할 때 용돈이 부족해 버스 기사님과 차비를 흥정하며 탔던 일, 벌초방학, 유채방학은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라는 의미에서 생긴 방학이었다는 점, 옛날에는 선배들이 어린 후배들의 집에서 키우는 닭을 잡아먹는 것이 못된 관행이었다는 점 등을 이야기해 주셨다. 눈물이 핑 돌 때까지 웃으며 이야기해 주시는 김량이 이모의 얼굴에는 어릴 적 개구쟁이였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후에도 약 1시간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뜨개질로 옷 뜨는 법을 배우러 가겠다는 나의 마지막 말로 긴 수다는 끝이 났다. 그렇게 나의 오후는 느긋하게 자연의 공기 안에서 누군가의 입으로 제주의 옛 모습을 마음속에 채우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모들은 한 명씩 모두 다른 시각에 나에게 퇴원 일자를 묻곤 했다. 첫날 각자의 상처에 대해 묻고 답하며 나눴던 실제 고통의 정도도 현재는 많이 완화되어 치료가 잘 되었다는 만족스러움을 표현할 무렵이다. 퇴원하면 뭐 할 거냐는 공주 이모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김량이 이모가 대신 대답을 해주셨다. "직장인인데 일해야지." 나는 내 일이 아닌 것 마냥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일 해야죠~!"

큰 병이 아닌데도 치료를 위해 입원을 하게 되어 요양하듯 입원생활을 했던 나에게 지난 3일 같은 비일상은 일상에서 누적되었던 피로를 회복한 경험이었고, 이모들과 함께해서 좋았음을 전달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나의 일상의 피로감에서 이곳이 비일상으로써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을 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의 피로는 내가 일상을 보내는 속도와 리듬의 문제라는 것을 느낀다. 빠릿빠릿한 척을 하느라 피로를 느꼈고, 그러느라 내 적정 속도도 모른 체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니 생산성이 없다 느끼고 내 행동에 후회를 했다. 후회를 하면 뭐 하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하다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내 손으로 막지도 못한 지난날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4인실 병실에서의 생활과 몸을 회복하는 것에 시간을 충분히 들여 움직였고, 재미도 성찰도 얻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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