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5경

오늘도치킨과맥주가좋다 제주 한국

by 낮술

나는 제주 어디든 사랑에 빠지고 만다. 제주는 상쾌하고 산경하다. 사투리도 좋고 시절도 좋다. 오름도 좋고 한라산도 좋다.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풀도 좋고 나무도 좋다. 삼춘들도 좋고 할망들도 좋다. 옥돔구이도 좋고 고등어회도 좋다. 내 안의 폴리네시안 유전자는 제주를 만나면 공명한다.


언제나 몸 누일 데가 있는게 제주다. 하나가 살다 떠나면 하나가 살러간다. 제주로 이주해 오래 살던 친구 하나가 외국 남자를 만나 따나고 또 다른 한 명이 제주에 살게 됐다. 서울선 성기었던 이가 제주로 이사가고부터 외려 왕래가 생겼다. 서울에 산다는 것만으로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 그리고 지리한 연애가 파한 덕분에 제주살이를 택했다 했다. 서울에서의 그보다 제주에서의 그가 더 그다워졌다. 안 그래도 까맣던 피부는 흑단빛으로 영글었고,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비위를 맞추는 건 부업으로 삼고 참신한 본업을 찾았다.


제주서 살 곳을 찾으러 떠돌던 그가 자릴 잡은 곳은 한림이다. 유자들이 이 마을을 한림翰林으로 개명하기 전엔 한수풀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원시림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도내에서는 제주, 서귀포 다음으로 큰 마을이란다. 한림항은 어항뿐만이 아니라, 시멘트나 모래가 오가는 상항도 크다. 읍 행정구역치고는 2만 명이 넘게 살고, 한국의 여느 항구가 그렇듯 인도네시아인 선원들도 무리 지어 다닌다. 양돈도 많이 하는 지역이라 비가 오는 날이면 돼지 축사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남으로는 한라산이 멀거니 솟아있고 북녘으론 비양도가 보인다.


한겨울에 흐드러진 제주의 애기동백


그뿐만이 아니다. 한림엔 한림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빼어난 풍경이 다섯 있다. 이를 한림 5경이라 부르기로 한다. 제1경은 한림읍의 랜드마크 한림성당이다. 정랑 하나 걸리지 않은 하느님의 집은 대문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옛 구조를 그대로 보존한 뒤 증축한 본당이 보인다. 본당 옆으로는 벽돌로 곱게 치레해 놓은 부속건물이 있다. 곳곳에 제주의 나무들과 화초들이 심어져 있다. 이곳에선 어떤 냉담자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게 되리라.


낮에도 밤에도 아름다운 한림성당


제2경은 한림성당 앞에 자리한 ‘마이크로 하비타트’다. 여관건물 1층에 세 들어 사는 이곳은 질박한 다방이다. 유유자적 또 애틋하게 커피와 과자를 준비하는 가게 주인을 보면 비로소 내가 제주에 와있음을 느낀다. 안에선 적도의 향으로 가득한 드립커피를 마시고, 에스프레소로 만든 커피를 포장해나와 한림항을 마주 보고 오른쪽으로 난 올레길을 걸어올라 가면 무척 좋다.


카페의 화장실. 카페 이름의 유래


제3경은 한림수협 사우나다. 사우나는 한림의 최신식 복합건물 한림수협 3층에 있다. 통창이 달린 지상의 사우나는 땀 내고 몸뚱이를 닦는 내내 눈이 부시게 바다를 내어 보인다. 냉탕에 몸을 담그고 쭉 뻗은 방파제와 너르게 땅을 골라놓은 야적장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은 흡사 인더스트리얼한 미학을 담은 회화 한편을 감상하는 듯할 것이다.


제4경은 금능해변이다. 여태껏 가본 제주바다가 10개로 친다면 그중 금능이 최고다. 작게 호를 그리는 폭이 좁은 해변 앞으로 망망한 대해가 마주서 있고 멀리 보이는 야자수들이 늘어서 한껏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해변이 좁은 것 때문인지 바로 옆 협재보다는 사람이 덜 오는 편인 것도 같다. 모래는 밝고 돌은 검고 물은 찬란히 맑다. 영락없는 제주 바다다. 친구네 집에서 러닝 거리로 5킬로미터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운동복 속엔 수영복을 입고 물통 하나 들고 뛰어가서 물속에 바로 뛰어들기만 하면 된다. 제주에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한림해변의 동쪽 끝자락


허나 뭐니 해도 한림 5경 중 으뜸은 바로 제5경, 옛날식 호프집 ‘오늘도치킨과맥주가좋다‘다. 가게는 한림항 검은 물속으로 미끄러져 빠질 것 같은 자리에 있다. 어두컴컴한 부둣가에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면 서술형 상호가 적힌 커다란 노란색 간판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망설일 것 없다. 해가 지면 문 열린 집 찾기가 더 힘든 읍내에서 불이 켜진 간판은 땅 위의 등대다.


예닐곱 개 너른 테이블이 있고 주방은 속이 훤히 다 보이게 반짝거린다. 이모님 두 분이 주문도 받고 조리도 하고 음식도 가져다주신다. 생맥주와 한라산 소주를 시켜놓고 차례를 기다린다. 치킨은 튀김옷을 직접 반죽해 튀겨내신다. 직접 만드는 치킨이 있는 호프집이야말로 평이라는 것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0호 정도 크기 닭을 명료하게 튀겨낸 문자 그대로 ‘후라이드 치킨’이다.


후라이드 치킨이 끝이라면 이곳이 절경이 될 수 없다. 통오징어 튀김을 주문한다. 응당 국내산 생물 오징어다. 큼직하고 오동통하다. 바삭바삭한 튀김옷도 짭조름하게 양념을 해놓아 입에 착 달라붙는다. 그냥 먹어도 좋고 마요네즈나 간장에 찍어먹어도 좋지만 가게에서 직접 담근 새콤하고 매콤한 무절임과 곁들여도 딱이다. 배는 부르지만 한라산 계란말이를 주문한다. 파를 썰어 넣은 간간한 계란말이는 어떤 호프집과 견주어봐도 모자라지 않을 퀄리티다. 과연 설문대할망들이 요술을 부려 만드는 신묘한 음식들이다.



소주 몇 병을 끝내고 친구집으로 돌아간다. 달은 교교하게 떠있고 맑디 맑은 제주 밤하늘은 왠지 비취색이다. 그윽한 밤길을 주욱 따라가다보면 대궐같은 친구의 집이 나온다. 친구는 날 맞이하고자 작은 아파트 빈방에 오징어 튀김보다 더욱 바삭거리는, 마음의 기름으로 튀겨낸 이부자리를 깔아놓았다. 못내 아쉬워 편의점에서 맥주 캔 몇 개를 사서 들어간다. 오늘 밤엔 꿈속에서도 한 잔 더 마실 결심이다.


작가의 이전글소울푸드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