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부산족발 부산 한국
아마도 올해는 내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년수보다 서울에서 산 그것이 앞지르는 해인 것 같다. 서울은 이제 제법 익었지만 내가 영원히 이방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 감각이 동일한 값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산은 언제나 나에게 발가벗겨진 느낌을 준다. 서부산의 지하철 1호선을 역들을 스치면 방어막 없이 무기력한 유년시절이 속절없이 디스플레이된다. 부산은 엄마의 얼굴도 닮았고 아빠의 냄새도 나고 형의 몸짓처럼 움직인다. 그것들을 조금씩 닮아 조형된 내가 날것 그대로 드러나있다.
아빠는 내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유산은 고작 50퍼센트의 유전자 구성과 미각이다. 아빠는 세디 센 이빨만큼이나 별난 혀를 지니고 있었다. 술과 음식을 즐기고 식당 주인들과의 관계 맺기를 중요시 여겼다. 사람 좋은 낯을 하고선 상다리가 부러지게 주문을 했다. 오랜 단골집이라 하더라도 맘에 안 드는 점이 하나라도 생기면 야멸차게 발길을 끊었다. 음식과 술 앞에서는 왕후장상이 따로 없었다. 조부는 아빠를 많이 때렸다고 했고 조모는 아빠 앞에서 엎드렸다고 했다.
새카만 멸치젓갈을 맛깔스럽게 밑반찬으로 내오던 다대포의 횟집, 돼지갈비를 잘하던 집, 투명한 닭가슴살과 닭똥집 육회를 먹을 수 있었던 부산 근교의 가든집. 지금까지도 그 모든 맛들은 또렷하다. 달큼한 맛, 짭조름한 맛, 감칠맛, 비릿한 맛, 섬유질과 육질이 잘게 부서져 식도를 넘어갈 때의 그 감각까지. 이제는 얼굴도 아물거리는 아빠는 미각으로 화해 내 혓바닥 위에 소멸하지 않는 요철로 남았다.
부평동은 자갈치 시장과 깡통시장 사이에 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동네다. 부평동은 자동스레 족발거리라는 말과 따라붙는다. 말 그대로 족발집들이 끝없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세상의 족발집을 다 모아놓은 것처럼. 옛날 얘기다. 지금은 그 많던 족발집들이 폐업했고 대충 보니 네다섯 개 정도가 남은 것 같다.
아빠는 단 한 곳만을 고집했다. ‘부산족발’. 이곳의 족발만을 높게 쳤다. “다른 데는 씰데없이 스끼다시만 많이 나오고, 여기는 족발이 맛있다이가. 그런 집이 잘하는기다” 아직도 들리는 것 같은 독재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음성을 통해 퍼져나갔던,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폭군의 자기 확신. 그리고 그 절대왕정이 종식된 오늘날엔 마지막 군주가 사랑했던 족발집에 엄마와 둘이 앉아 대선소주 한 병과 족발 한 접시 시켜놓고 앉았다. 입맛이라는 건 별 도리없이 가증스럽다.
여기 족발은 차갑다. 차갑다기보다는 상온이다. 마치 수육처럼 따뜻하게 나오는 서울의 족발과 달리 청요리집 오향장육처럼 식힌 채로 상에 오른다. 잘 벼린 칼로 얇디얇게 썰어 나오는 족발은 입안에 들어가면 마치 풀잎이 한 장 너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살코기 부분도 비계 부분도 쫄깃하면서 부드럽고 잡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족발 외에도 나름 정갈하고 화려하다. 돌솥밥이나 해물로 맛을 낸 된장찌개,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상큼한 간장을 곁들인 소면, 신선한 겉절이, 걸쭉한 막장, 취청오이를 수북이 쌓은 간장 소스, 계란장 등 한상차림을 언급하고도 싶다마는 이 집의 족발이 가진 위력을 견주지 못한다.
부산족발을 먹고 난 뒤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창선동 세명약국 옆 골목에서 할매들이 쭈그려 앉아 말아파는 충무김밥을 먹었다. 그다음엔 깡통시장 골목을 찾아들어가 고기만두와 찐빵을 먹었다. 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부여잡고 왕과 그의 수족들은 승전보를 울리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차례 반복했을 그 행군은 이제 머릿속에 조각조각 스틸컷으로만 남았다.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밥상 앞에 앉은 나를 보는 것 말고는 딱히 아빠를 반추할 길은 없다. 그는 그저 맛으로만 기억되는 이 정도인 게 좋다. 딱 이 정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