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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정 Aug 29. 2021

당신이 섰던 곳에 내가 선다면

빈센트 반 고흐를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제는   전의 추억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합니다. 취향을 만나기 위해 했던 도전  가장 대범한 일이었으니 꺼내 보도록 할게요. 대학생이던 저는 휴학을 하고 돈을 모아  달간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욕도, 왠지 모를 조급함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저는 계획에 더불어 테마까지 정했지요. 두세 가지 테마  하나는 ‘빈센트  고흐였어요. (나머지 테마들은 성공하지 못해 혼자만의 비밀이 되었습니다) ‘ 고흐 ‘고흐 아니라 ‘ 고흐  아시나요? ‘ 고흐 ‘ 같은 성이고, ‘빈센트 ‘혜정같은 이름이라고 해요.  고흐는 성보다는 이름으로, 빈센트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를 빈센트라 부르며 적어가겠습니다. 이제부터 빈센트가 인생의 말년을 보낸   하나인 프랑스 아를에서 머물렀던 며칠 간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프랑스 아를. 빈센트의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익숙할지도 몰라요. 밤의 풍경을 담은 그림 중 하나인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배경이거든요. 아시다시피 빈센트는 37여 년의 짧은 생을 살았습니다. 태어나 자란 네덜란드 쥔더르트와 성공하기 위해 찾았던 프랑스 파리, 고갱과 함께했던 프랑스 남부의 아를, 그리고 파리에서 멀지 않은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아를을 찾기로 했어요. 아를에서 빈센트는 고갱과 함께 살기도 했고, 스스로 귀를 잘라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했었죠.


제가 프랑스 아를을 찾은 이유는 오직 빈센트 반 고흐였습니다. 기차가 프랑스 남부를 향해 달릴수록, 창밖에는 처음 보지만 익숙한 풍경들이 펼쳐졌어요. 빈센트의 그림에서 자주 보았던 해바라기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빈센트가 ‘미치광이’라서 뾰족하고 꼬불꼬불한 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었어요. 그의 그림 속 모습 그대로 생긴 나무들이었어요!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했습니다. 너희가 바로 그 사이프러스구나! 아를이 멀지 않았어!



아를로 향하는 기차 안




아를은 조용하고 차분한 빛과 공기를 가진 소도시였어요. 사진 축제를 맞아 골목골목이 꾸며져 있어 마을 자체가 거대한 갤러리 같았습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이국적인 모습에 더욱 그렇게 느끼기도 했고요. 높은 벽돌집들로 싸인 좁은 골목에 노란빛이 내려앉는 모습은 빈센트가 머물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싶어 더 박찼습니다.




아를의 골목길




빈센트 덕분에 아를은 작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가 되었어요. 그림 속 배경이 된 공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곳곳에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저는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그 표식들을 따라 빈센트가 밟았던 곳을 밟고, 그가 섰던 곳에 서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적어도 백 년은 넘었을 법한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광장과 원형 경기장이 있는 번화가와 꽤 떨어진 곳에 빈센트가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번화가보다는 아를의 기차역과 가까웠으니, 보통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가는 그저 그런 길목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아를에서 그린 많은 그림이 번화가나 그 근처의 풍경들을 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관찰하기 위해 휴대용 이젤과 물감, 캔버스 등을 들고 조용한 길을 매일 같이 걸어 다녔을 빈센트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노란 집(The Yellow House)>과 아를의 모습


빈센트와 고갱이 함께 했던 모습의 노란 집은 없었지만, 그 노란 집과 꼭 닮은 네모난 건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번화가와 멀리 떨어져 자동차만 지나다닐 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모른 채 다들 스쳐 지나지도 않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멈춰 서 있던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와 아를의 모습


그가 살던 집과는 멀리 떨어진 번화가의 입구. 집과의 거리도 꽤 되는데, 빈센트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보냈을까요? 그렇게 쌓인 시간을 거쳐 그의 일상이 그림이 되었겠지요. 밤의 빛을 노랗게 그려낸 빈센트 덕분에, 그 카페는 지금도 온통 노란빛으로 싸여있었습니다. 빈센트가 보냈을 많은 밤만큼 낭만적인 곳으로 상상했었는데, 그림과 다른 낮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샛노란 풍경 때문인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져 그냥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카페 이름도 ‘카페 반 고흐’랍니다.


다른 때에 다시 갔더라면, 낮이 아닌 밤에 갔더라면, 지금 다시 가게 된다면 혼자 앉아 술 한잔을, 가능하다면 압생트 한잔을 마시게 될까요? 기대와 다르게 실망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 여전히 아쉽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아를 공원의 입구(Entrance to the Public Gardens in Arles)>와 아를의 모습


저는 일상이자 삶의 배경인 서울에서도, 먼 곳으로 여행을 가서도 공원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저 공원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재로 채워지는 공원의 풍경을 좋아해요. 사람이 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니,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곳에서 고요히 앉아 여유롭게 주변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를의 공원도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더군요. 조금 더 조용하고 차분하긴 했지만, 각자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정말 좋았어요. 잔디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 산책을 나와 걷던 아이와 빈 유아차를 끌던 엄마의 모습, 벤치에 앉아 평화롭게 책을 읽던 사람, 그리고 저처럼 그림 속의 풍경을 찾아온 사람들까지. 아를의 일상이 가득하던 공원이었어요. 빈센트가 보았던 공원도 이렇게 일상적이었을까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아를 병원의 정원(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at Arles)>과 아를의 모습


아를의 여행 안내 센터와 멀지 않은 곳에는 빈센트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이 있습니다. 제가 갔던 때는 뜨거운 햇빛을 만끽할 수밖에 없는 여름이었어요. 빈센트가 그렸던 겨울의 풍경과는 다르게 한여름의 정원은 꽃들이 서로 다투듯 만발해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그가 입원해 살던 정신병원이었던 곳은 빈센트 덕분에 갤러리 등의 문화공간과 무려 레스토랑까지 갖춘 곳이 되었어요. 누군가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뒤 들어가야 했던 정신병원이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밝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의 그림 덕분에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게 된 것이고, 그 덕분에 우울했던 공간이 밝게 변할 수 있던 것이겠지요. 몇 년 전의 일이니,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네요. 부디 여전히 밝은 분위기로 가득 찬 곳이기를 바랍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Night Over the Rhone)>와 아를의 모습


빈센트가 그린 밤의 풍경은 스크린을 통해 보아도 실제 풍경을 보듯 한참을 관찰하게 되는 마법을 가졌어요. 하늘의 별과 강의 물도 모두 빛에 일렁이는 것 같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가 움직인 붓의 궤적이 만져질 것 같아 더욱 집념을 갖고 살피게 되지요.


빈센트가 담았던 밤의 풍경은 보지 못했지만, 강가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읽는 사람을 보았어요. 그는 왜 아무것도 없는 강가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요? 적막과 바람 소리, 간간히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존재하는 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것을 만들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혹시나 그도 빈센트와 같은 예술가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응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들여다보는 사진들입니다. 당신이 섰던 곳에 내가 섰다는 것. 당신이 봤던 것을 내가 봤다는 체험. 수많은 시간을 건너, 좋아하는 예술가와 드디어 겹쳐질 수 있었어요. 그것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찼습니다. 다른 시간을 살았던 예술가와 겹쳐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니까요. 공간을 넘어 그와 같은 시간에 설 수 있다면, 저는 빈센트를 찾아갈까요? 그와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BBC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빈센트 반 고흐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의 장면


영국의 드라마인 <닥터 후>에서는 그 상상을 이야기로 그려냈습니다. <닥터 후>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이며 세계적으로 수많은 ‘덕후’를 보유하고 있지요. 이 드라마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소재로 다룬 에피소드를 제작했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닥터는 시간 여행을 하는데요.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해 절망하는 과거의 빈센트와 잠시 현대로 여행해요. 지금의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큰 애정을 담아 바라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하는지 목격하게 합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를 여러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울어요. 살아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해 절망하다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에게 온 마음을 담아 보내는 위로와 사랑, 존경이라고 생각해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정말, 빈센트에게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어요. 당신의 작품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당신이 밟고 머물렀던 자리에 서기 위해 지구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고, 당신이 병으로 갇혀 그림을 그리던 곳은 사람들이 모여 밝은 웃음을 나누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곳이 되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다른 이들의 세상이 넓어진 게, 그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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