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걸 왜 좋아할까?
취향을 가꾸고 감상하기 위해 종종 미술관을 찾습니다. 미술관에서 전시될 수 있는 작품의 범주는 무한하죠. 그 무한한 종류의 작품 중 저는 특히 회화를 좋아합니다. 미술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예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쁜 그림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예쁘다’는 말의 의미부터 짚어보고 싶어요.
‘예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볼까요.
「형용사」
「1」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예쁘다는 말의 정의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예쁘다’에도 특정 관점이나 평가가 포함되지 않고,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임을 미리 알립니다. 그에 더불어 사전에서 정의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확장하고 싶어요. 보는 것 이상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표현으로 쓰는 것이죠. 앞으로 ‘예쁘다’고 부를 많은 취향을 소개하게 될 취향 가이드로서 예쁘다는 말의 정의를 새롭게 지어보겠습니다.
예쁘다 「형용사」
아름답게 느껴져 마음이 기울 정도로 좋다.
자, 이제 제가 예쁘다 느끼는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저는 빛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려낸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만질 수 없고, 실체도 없는 빛을 종이 위에 색으로 표현해낸 것이 무척 매력적이에요. 결코 손에 쥘 수 없고, 평면적이지도 않은 빛을 종이 위에 표현해낸 것 자체가 놀라워요. 분명 존재하지만, 형체가 없는 빛은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매혹적인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 빛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려냈어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비교적 자주 접하고 익숙해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왜’ 좋아할까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을 것 같아요. 그저 ‘예쁘니까’. 예쁘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엔 우리의 좋아하는 마음은 더욱 넓고 소중하니, 왜 아름답게 느껴지고 왜 마음이 기우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해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빛을 예민하게 그려낸 것처럼 빛이 아닌 대상을 그릴 때도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담은 듯합니다.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에 섬세한 애정과 마음을 담은 것 같아요. 어떤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행동은 당연히 애정에서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가고, 작은 습관들을 발견하게 되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금세 눈치채게 됩니다. 그림이나 사진,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담은 작품들은 늘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클로드 모네와 호아킨 소로야 등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는 지베르니의 풍경들을 많이 그렸어요. 같은 곳에서 같은 풍경을, 다른 빛 아래에서 여러 번 그린 것에서 그 풍경에 향한 모네의 애정이 느껴지지요. 호아킨 소로야는 아내와 아이들, 바다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그림들을 볼 때면 작가가 애정을 담아 그린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것은 역시 다르달까요.
대상이나 풍경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 담겨있어 빛도 더욱 따뜻하고 세밀해 보여요. 제가 예쁘다 느끼는 인상주의 그림들의 공통점을 찾은 것 같네요. 예민하면서도 다정한 시선. 저는 다정한 마음이 담긴 모든 것에 약한 편입니다. 마음 써 만들어낸 것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주게 되니까요. 당연하게 존재하는 빛에 집착해 캔버스 위에 예민하게 그려낸 성정이 담겨있습니다. 예민한 것은 번잡함과 불편함으로 치환되곤 하지만, 저는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에 예민해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도 무척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후기 인상주의 혹은 탈인상주의 화가로 구분되는 빈센트 반 고흐인데요. 반 고흐는 화가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계속해서 노력했어요. 안타깝게도 성공과 가까워지는 길목에서 스스로 삶을 끝냈습니다. 꿈을 향한 열망이 컸던 만큼 삶을 살아내는 것을 유독 어려워한 게 아닐까,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세상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인 탓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후반에 그려낸 작품들에서 예민함과 복잡한 마음이 더욱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움직인 흔적이 그대로 남은 거칠고 두꺼운 붓 터치에서 그의 복잡한 마음이 보여요. 어느 방향으로 붓을 쥐고, 캔버스에 어떻게 처음 닿아 어느 쪽으로, 얼마큼의 힘을 주고 나아갔는지 느껴집니다. 직접 만질 수는 없지만, 눈으로도 만져지는 듯해요. 그가 캔버스 앞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으니, 마치 같은 시간과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저 두 세발자국 떨어져 그림을 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죠. 그래서 저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마다 예쁘다는 느낌 이상으로, 마음이 울렁일 만큼 벅찹니다.
마음이 기울고, 벅찬 것은 새로운 원동력이 주기도,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세상에 예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해요. 그런 예쁜 것들에 기대어 사는 것을 일시 방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발견’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장 떨리는 설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넘어 왜 좋아하는지, 왜 예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깊게 탐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더욱 넓은 세상을 열어주고, 좋아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그 넓은 세상에서 나에 집중하게 하니까요. 이유를 깨달으면서 감상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물론, 나에 대해 더욱더 잘 알게 됩니다. 그저 예쁘고 좋다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더 많은 취향을 조금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취향의 발견은 정말로, 더 넓은 세상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제가 그와 겹쳐지는 느낌에 벅찬 것을 깨닫고, 결국 그가 그림을 그렸던 곳에 서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던 것처럼 말이죠. 그 이야기는 이어지는 <취향 가이드>에서 들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