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대학 소속 연구원과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지참하지 않고는 도서관에 출입할 수 없다고 나지막이 말하며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어요."
성별 때문에 도서관에 출입을 못 한다니, 정말 암담한 시대였네.
위의 인용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의 일부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29년의 일이다.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시대는 그야말로 여성의 행동과 업業에 대해 수많은 간섭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있던 때다. 하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도서관 출입도 금지당했으니 말이다.
2018년이 되었고... 대략 90년 정도가 흘렀네. 이제 더 이상 여성은 도서관에 출입할 때 자신의 지위를 보증해줄 연구원이나 소개장을 지니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90년 전의 한반도에서는 애초에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얼마 없었으리라는 점은 차치하고, 아무튼 여성이라고 도서관 정문 앞에서 이를 막아서는 사람들은 없다.
얼마 전 시작한 tvN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자. 손녀 애신(김태리 분)이 의병활동을 했던 부모님의 뒤를 이으려고 하자, 애신의 할아버지 고사홍(이호재 분)이 극구 반대하면서 둘의 갈등이 시작된다. “나비나 화초나 수놓으며 살아라. 그게 그리도 어렵다는 말이냐?”라는 말에 애신은 “그럼 차라리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고사홍의 대답은 이렇다. “그럼 죽어라.”
드라마이고 픽션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이 땅에서 집 밖의 삶을 택한 여성들에게 “죽어라”라고 말한 시대가 엄존했을 것임을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은? 다행히 이제는 여성이 나비나 화초를 수놓는 것 말고 다른 삶을 택하겠다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죽으라 말하는 이는 찾기 힘드리라.
그렇게 90년 전과 오늘을 비교해보자. 그동안 대한민국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일구어냈고, 수많은 사회 제도를 만들어냈다.
제도는 하한선인 동시에 그 사회의 목표를 의미한다. 아니 하한선이 어떻게 목표가 돼?
형벌도 제도다. 물건을 훔치면 처벌을 받는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쳐서 징역 6년(실제 절도죄의 법정 최장형)을 받았다고 해보자. 이 ‘징역 6년’은 법정 최장형이라 해도 물건을 실제로 훔친 그 사람에 대해 사회가 직접적으로 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재제다. 그렇지만 징역 6년이라는 형벌을 내리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물건을 훔친 자를 징역살이하게 하는 제도는 ‘물건을 훔치지 않는 사회’라는 목표를 의미한다.
형벌 같은 거창한 제도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집 앞 국밥집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깍두기는 먹을 만큼만 가져가세요. 깍두기 남기면 벌금 1000원 징수하겠음.”
이건 사장님이 만든 그 가게라는 사회 나름의 제도다. 1000원을 더 받는 건 사장님이 깍두기를 남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재제의 하한선이다. ‘징수’하겠음, 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압감과는 다르게 1000원이라는 금액은 사실 별로 위압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진짜 사장님이 천원 더 받으려고 이걸 만들어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제에에발 좀 남기지 맙시다”라는 뜻인 걸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깍두기 남기면 벌금이라는 제도는 “깍두기 남기지 않는 식당”이라는 사회의 목표를 의미한다.
벌 주는 것만 제도는 아니지. 요사이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임대차보호법도 제도다. 현행법에서는 임대차 계약 후 5년까지 임차인의 계약 갱신을 보장해주고 있다. ‘5년’은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보장의 하한선이다. “5년만 지나면 건물주 마음대로 해도 된다”가 이 제도의 의미는 아니다. 이 제도의 목표는 “(경제적 지위상 상대적으로 약자인) 임차인의 권리가 보장받는 사회”다. 그래서 계약 갱신 요구권의 보장 기간을 10년으로 늘리자는 운동은 이 제도가 함의하고 있는 그 목표에 더 다가서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회의 제도는 하한선인 동시에 그 사회의 목표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목표'는 잘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건물주들은 5년이 지난 후에 보증금 월세를 두 배 세 배로 올리면서도 “법대로 5년 지났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보장기간이 10년이 되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요새는 세입자들이 진짜 살기 좋은 세상이다. 건물주만 죽어나지…”
과연 그런가?
“여자가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데”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물론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제도'에만 국한해 바라보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역차별'을 말하는 이들이 표적으로 삼는 것은 제도다. 여성 공천 할당제, 여성 휴게실... 실제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 중 누군가는 이 제도의 겉모습만 본다. 그렇지만 그 제도가 함의하는 목표가 '(오랜 세월 차별받아 왔던) 여성의 권익 보호'에 있음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여성에게 공천 할당을 주는 것은 “30%”라는 수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충분한 정치적 힘을 가지는 사회"를 목표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여성들이 정치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역사를 생각해 보자. 제헌 국회에서는 여성이 없었고, 2대 국회에서 당선된 여성 국회의원은 단 두 명이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역대 최다인 26명의 여성 지역구의원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국회의원 전체 수의 8.6%에 불과한 숫자다. 비례대표 당선자까지 합쳐야 51명으로 17%가 된다. 여성이 객관적으로 능력이 없어서 여성 국회의원이 적은 것일까? 2대 국회에서 20대 국회까지 4년마다 매 회 여성 후보들의 객관적인 ‘능력'이 꾸준히 증가해서 여성 당선자의 비율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여성들의 능력이 계속 증가하면 걱정이 많아질 사람들도 있겠다.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던 시대는 ‘암담한 시대’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문제들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와 오늘을 단절한다."요즘 시대에 무슨 성차별이야" 라는 말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차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아직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도서관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잖아. 뭐가 문제야?" 하는 꼴이다. 그 안일한 단절이 이 시대를 더 암담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은 원래 내 눈 앞의 ‘지금 여기’만을 바라보며 산다. 그러니 당장 자신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걸 쉽게 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들이 왜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혹 자신이 보지 못한 ‘어제'들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