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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Aug 07. 2023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백종관의 <추방자들>

열 번째 날인 2017년 11월 29일, 백종관 감독은 2-3층 정도 돼 보이는 건물 창가에 앉아 그 밑에 있는 이마이즈미 공원을 찍는다. 영화는 이 공원을 유일한 배경으로 두고, 고정된 화면, 하나의 쇼트로 구성된다. 고정된 화면 속을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반복해서 들락날락한다. 이게 관객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다. 영화의 제목은 <추방자들>이다. 영어로는 The History of Perception. 지각의 역사.


감독은 영화를 극단적으로 관객에게 맡긴다. 영화가 시작되고 Day 10라는 자막이 뜬다. 나는 그 자막을 보고, 아마 이 영화는 감독이 공원을 찍으러 간 열 번째 날에 얻은 쇼트일 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11월 18일부터 감독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공원을 촬영하고, 촬영된 쇼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의 쇼트를 선택했을 것이다. 물론 그 후로 며칠을 더 촬영했는지는 알 수 없다. Day 100의 쇼트가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Day 10의 쇼트가 선택된 이유이다. 감독은 우연히 찍힌 피사체들을 선별해서 관객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을 지각의 역사라고 지었다. 감독이 고르고 편집한 영화가 지각의 역사가 됐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감독의 말이 맞다. 지각이란 원래 그래왔다. 즉 관객은 그날, 그 공원을 지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시각적인 지각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관객은 이 영화에 찍힌 모든 피사체를 봤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면은 고정되어 있고, 초점도 모두 맞아있다. 영화의 피사체를 관찰하기엔 가장 좋은 조건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누구나 그냥 지나쳐 버릴 것만 같은 휑한 공원에, 네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화면에 들어온다. 그중 세 명은 가운데 계단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나머지 한 명은 그보다 살짝 더 위쪽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세 명의 무리를 중심으로 화면의 위쪽과 아래쪽에서 자동차와 사람들이 끊임없이 화면을 횡단한다. 9분쯤에는 무리 중 한 명이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발견했는지 카메라 쪽으로 다가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18분쯤에는 감독이 연출한 것 마냥 택시의 노란 등이 화면 오른편 밑쪽 모서리에 정확히 걸쳐진다. 그리고 영화 촬영 도중 해가 지는 바람에 화면은 완전히 까맣게 변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피사체들을 화면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피사체들은 분명 거기에 있는데 관객은 볼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논픽션일까? 감독은 영화에 등장하는 피사체들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걸까? 혹시 감독이 배우들을 한 명씩 내보낸 것은 아닐까? 관객은 이 모든 것을 절대 알 수 없다. 관객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해서 이마이즈미 공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감독이 보여준 것만 볼뿐이다. 따라서 영화로 ‘지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추방자들>은 지각의 역사가 아니라 지각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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