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다큐 <댄싱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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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합정에서 잠시 망설이다 목동 메가박스까지 가서 무용 다큐 <댄싱 베토벤>을 봤다. 더 미루었다간 스크린으로 보기 어려워 보였다. 개봉 2주만에 극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소개되었고, 지난해 연말 제1회 서울무용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했다. 모리스 베자르 로잔 발레단과 도쿄 발레단(그리고 주빈 메타의 이스라엘 필하모닉)이 함께한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도쿄 공연 제작과정을 담았다.
모리스 베자르. 기억을 되짚어보니 대전에서 베자르 발레단의 공연을 본 때가 2005년이다. 베자르는 2007년 타계했다. 아마 고령으로 당시 내한하진 못했을 것이다. 왜 대전에서만 공연하고 갔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그때 초기 대표작 <볼레로>를 직접 봤다. 포효하는 남성 발레. 에미오 그레코의 춤 <볼레로>도 그렇듯 라벨의 이 음악이 남성성을 자극하는 건 틀림없다. 야수성이라 말해도 좋다.
<댄싱 베토벤>에서 발레단의 간판격으로 비치는 오스카(콜롬비아 출신)도 야성적이다.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야성. 희석된 어둠. 베자르는 남성 무용수를 전면에 내세운 안무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20세기 발레단'은 모던발레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만큼 컨템포러리 무용에 가까이 갔다. 구분이 부질없을 만큼. 이는 롤랑 프티나 이리 킬리언 같은 '고전적' 모던발레의 거장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베토벤 9번 교황곡'을 동서양 발레단이 뭉쳐 춤으로 재현하려는 이 기획에 살아 있는 베자르는 없다. 그래도 그의 그림자는 깊다. 춤에선 힘있는 원시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거기에 곡선의 리듬감을 강조한다. 연습 장면에서 무릎을 구부리는 플리에를 거쳐 직선으로 뻗으라는 지시가 자주 나온다. 그래서인지 동작이 좀더 다이나믹하고 풍성하다. 유럽 발레단의 인종적 다양성은 늘 부럽다. 일본 남자 무용수 둘이 주역급이다.
베자르의 일본 사랑은 처음 알았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일본적인 것은 오랫동안 서양 예술가들을 매혹시켰다. 베자르도 원의 상징성, 선불교의 정신성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합창> 무대 바닥엔 기하학적 원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큐 자체의 완성도는 조금 아쉽다. 애써 스토리를 끌어내는 게 어색하고 과한 느낌이다. 피나 바우쉬를 다룬 <피나>를 넘어서는 무용 다큐가 나올 수 있을까. 영국 로열발레단을 스스로 뛰쳐나온 이단아 세르게이 폴루닌의 이야기인 <댄서>는 다큐이면서 극적인 드라마(뮤직비디오 같은)이기도 했다. <댄싱 베토벤>은 설명적인 부분이 다소 거슬리지만 연습 장면은 담담하게 잘 그려냈다.
무용 다큐의 매력은 공연이 완성되어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과 무대 뒤의 모습을 불 수 있다는 점이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어도 춤출 때가 가장 좋다는 댄서들. 너무 힘들다면서도 행복해하는 이들. 몸을 다 소진해가며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에게선 일순간 경건함이 느껴진다. 예술감독이 한 댄서에게, 지치니까 오히려 춤이 더 좋다고 말한다. 자연스럽다는 뜻으로 읽혔다. 지치고 한계에 다다랐을 때 몸은 역설적으로 가장 빛난다. 몸의 진실과 마주한 순간이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