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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16. 2021

탱글 타워 Tangle Tower

독특한 형식의 웰메이드 추리 게임

탐정이 되어 살인사건의 범인을 쫓는 추리 게임!


배경은 탱글 타워라는 기묘한 성, 아니 유서 깊은 저택이다.

무작정 탱글 타워로 가즈아~로 게임 시작. 저런 집 하나 갖고 싶네.


UI가 직관적이라 튜토리얼이 없이 바로 본편으로 뛰어들어도 무리가 없다. 아, 그래서 애초에 튜토리얼 따위 없지.


딱히 체계적으로 정리된 파일은 아니다. 사건 파일이라지만 사건 개요 정도.



Freya Fellow라는 화가 아가씨가 살해되었다. 흉기도 범인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미완성 그림 속 인물이 칼을 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칼끝의 빨간색은 물감이 아니라 진짜 피였다. 그림에 찔려 죽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 게임은 [관찰]-[탐문]-[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추리 게임의 정석을 잘 따르고 있지만, 거기에 나름의 차별화된 요소를 더하여 게임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사건현장인 Flora의 탑.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긴 머리의 여인이 Flora다. 사건의 목격자이자 용의자이기도 하지.



이를 테면 [탐문] 과정에서 많은 추리 게임들이 게이머로 하여금 적절한 "대화문"을 선택하게 하는 반면, 이 게임은 대화의 "소재"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대화문을 선택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하드보일드 추리게임 <진구지 사부로>의 한 장면이야.


이런 식으로 실제 대화를 나눌 때처럼 구체적 화제를 선택한다는 건데, 이렇게 할 때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 극적인 연출에 유용하다. 예를 들어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총 맞아 죽는다거나, 상대의 거짓말을 추궁하여 궁지로 몰아넣는다거나.


단점: 대화 트리를 Full Search해야 하는 고단함이 있다. 극적인 경우는 적을 수밖에 없고, 보통은 어차피 다 눌러봐야 하는데 DFS(depth first search)로 모든 대화를 훑다 보면 분기점 선택이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진다.



탱글 타워는 대화 파트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여 위의 단점을 해결했다. 매우 정형화된 기본 탐문용 대화를 제외하면, 용의자에게 "단서"나 "인물"을 화제로 제시하는 정도로 대화 인터랙션을 간소화한 것이다. 예컨대 Flora와 대화를 나눌 때 인물맵에서 Freya를 선택하면,


이런 식으로 캐릭터들끼리 알아서 관련 대화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수집한 단서, 예를 들어 초상화를 제시하면,

묵비권;;;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알아서 대화를 전개한다. 매우 편하다! 이건 코딩으로 치면 스파게티 코딩과 객체지향 코딩의 차이에 비할 수 있겠네. 대화가 모두 모듈화되어 있어 귀찮은 대화문 분기 따위 없다. 그러니 내가 이전에 어떤 선택지를 선택했는지 기억했다가 다른 걸 눌러보는 식으로 모든 대화 트리를 훑는 노가다도 필요없다!


다만 이렇게 하면 아무래도 긴장감이 좀 떨어진다. 감상용 비주얼 노벨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정통 추리 게임인데 말야. 제작진은 영리하게도 이를 보완할 요소를 넣어놓았다. 바로 [추리] 모듈이다.


단서와 탐문 내용을 바탕으로 게이머가 적극적으로 "추리"하여 통찰력 있는 "결론"을 문장으로 완성하는 것. 이 게임의 백미라 할 것이다.



이렇게 [문장 조각 A] [단서 1] [단서 2] [문장 조각 B]를 조합하여 말이 되는 추리를 해야 한다. (영어랑 어순 차이 이슈로 인해 단서 1과 문장 조각 A가 뒤집혀 있는 데 주의) 객관식이지만 조합이 무궁무진해서 이게 생각보다 시시하지 않다.


많은 추리 게임들이 추리 파트에서 문장 단위로 선택지를 제시하는 데 비해, 탱글 타워는 문장 조각 단위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게임들도 종종 있지만 탱글 타워에서처럼 깔끔하게 제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듯하다. 대화 모듈은 간소화하고 사고 모듈은 정교화한다. 탁월한 선택이라 평가한다.


다만 옥의 티를 하나 지적하자면, 대화 순서에 따라 간혹 인물들이 모순된 발언을 하기도 한다는 점. 뭐 심각한 건 아닌데 이를 테면, 게이머의 추리에 의해 거짓말이 간파당한 뒤에도 이전 단서 관련 대화를 다시 실행하면 여전히 거짓말을 전제한 증언을 하기도 한다. 객체지향 대화의 한계랄까. 대화 토픽맵이 그렇게까지 정교하진 않을 테니.


관찰 파트에서는 퍼즐을 통해 게임성을 높이고 있다. 즉 중요한 단서는 그냥 클릭만으로 획득할 수 없고,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아주 어려운 건 아니지만 조금은 생각해야 하는 퍼즐들이라 꽤 재미있다.



예컨대 플로라의 탑 왼쪽 아래에 보면 황금색 알이 놓여 있잖아? 이걸 조사하면,


요런 퍼즐이 나오고, 퍼즐을 풀어야만 알을 잠금해제할 수 있는 것이다.


알을 뒤집으면 요렇게 단서가 나온다.


위 퍼즐은 난이도가 낮은 편인데 그래도 알을 몇 번 뒤집어가며 보석들을 맞춰야 한다. 포토 메모리 능력자가 아니라면 말이지.


다양한 퍼즐들이 게이머를 즐겁게 해준다.


퍼즐 때문에 게임이 막힐 일은 없지만 적당히 방해물이 되어줘서 재미있는 듯.


중간중간 터지는 개그도 일품이다. 새장이 있는 방에서 거울을 클릭했더니, 조수인 샐리가 한다는 소리가




잘 만든 게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터페이스가 매우 유저친화적이라 등장인물과 단서들이 꽤 많이 등장함에도 노가다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류의 게임에서는 보기 드문 큰 장점이다. 보통 어드벤처, 특히 단서들을 이리저리 짜맞춰야 하는 추리 어드벤처에서는 비효율적 인터페이스가 주는 부담이 배가되기 때문. 또한 등장인물 각자의 캐릭터와 역할이 명확하고 그들 사이의 역학관계도 그럴싸해서 [탐문]하는 재미가 있다. 이를 테면 성격과 관심사에 따라 말투까지 바뀌기 때문에 실제로 다양한 용의자들을 탐문하고 그들의 페르소나 너머를 간파하여 중요 정보를 뽑아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재미 요소가 잘 어우러져서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렵다. 실제로 나도 하루저녁에 엔딩까지 달렸다.


여기까지가 칭찬. 하지만 이 게임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엔딩이 폭망이야. 뭐 좋게 말하면 약간 오픈 엔딩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허무한 결말. 떡밥 회수도 시원하게 되질 않는다. 아 진짜 뭐냐 이게? 그렇다고 '아시발꿈' 류의 현타 유발 엔딩은 아니고, 그냥 막판에 굉장히 급하게 마무리했다는 느낌. 시나리오 작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난 첨에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대화 다시 주의깊게 리스닝해보고 해외 포럼 리뷰까지 뒤져봤는데, 외국 게이머들도 "아 씨바 이게 뭐냐"라는 반응 일색. 


엔딩 5분 전까지는 정말 강추 추리 게임이었는데...


파이널 터치만 살짝 제대로 했더라면 명작이 되었을 텐데. 진짜 아쉽다. 그럼에도 훌륭한 시스템과 높은 게임성, 그리고 짧은 플레이타임을 고려할 때 한번 해볼 만한 게임이야. 어떤가, 나와 함께 이 허무함을 공유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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