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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Oct 24. 2021

이야기를 탐하지 않는 자는 영혼이 죽은 자다

이야기사냥은 계속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변명한다.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다 보면 소설 따위 유치해서 읽을 수 없다고.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말이다. 어떤 소설도 현실의 해상도를 따라올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들의 상상력 부재를 방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픽션을 매개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즐거움을 모르는 게지. 원래부터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된다. 점점 머리가 굳어가면서 자신의 경험세계가 전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뇌는 게으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세뇌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의한 세뇌 혹은 자신의 인생 비전에 의한 세뇌. 대부분은 전자겠지만 후자도 본질적 차이는 없다. 요컨대 '현실'을 주워섬기며 '가상'을 배척하는 자들은 단지 늙은 것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져서가 아니라 꼬추가 안 서기 때문에 여자애들에게 덜 휘둘리는 것과 같은 이치지. 


이야기를 탐하지 않는 자는 영혼이 죽은 자다. 물론 그 형식이 꼭 텍스트일 필요는 없다. 영화, 게임, 만화, 노래... 뭐든 상관없다. 단지 이야기면 충분하다. 근데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해서 영혼이 죽었다는 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언제나 이야기의 형태로 간직한다. 전문 용어로 '일화 기억'이라고 하지. 그런데 이 기억은 당연히 '사건 자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공되고 해석된 사건, 즉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는 완성된 이후에도 언제나 가공과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다. 타인에 의해서도 그러하지만 스스로에 의해서도 마찬가지. 즉 인간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가공하고 재해석하면서 욕망과 역량을 키워가는 존재다. 여기서 성장은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이야기의 가공과 해석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업데이트'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의 재발견. 의미란 결국 누적된 일화 기억들을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발생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를 경유하지 않는 의미란 없기에, 이야기를 탐하지 않는 자란 결국 무의미한 삶을 사는 자다. 


하지만 자기 삶의 이야기만 잘 만들어갈 수 있다면, '현실'도 아닌 픽션은 읽지 않아도 상관 없는 것 아닌가? 그게 그렇지가 않다. 왜냐? 나이가 들수록 한 인간의 삶이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릴 때야 로봇공학자도 될 수 있을 것 같고 대통령도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현실'을 깨닫고 거기에 순응하게 된다. 물론 이는 사회화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어느 정도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몽상가나 광인이 되어버릴 테니까. 허나 '현재 시점에 현실인 것'의 한계 내에서만 이야기를 써나간다면 재미도 없고 지루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새로운 루트를 찾아야 한다. 여기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발생한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아이디어 혹은 지향을 요구하는데, 이는 경험하지 못한 맥락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험했다면 이미 획득했겠지) 즉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경험을 요구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 하기/듣기를 통한 간접 경험이다. 


여기까지는 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장광설이었고, 이제 뭘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딱히 뭘 먹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역시 자기한테 땡기는 걸 먹으면 되지 않을까? 다만 지나친 편식은 역시 좋지 않을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의 장을 열기보다는 편집증의 공간을 전개할 위험이 있기 때문. 


나 같은 경우에는 형식이나 장르를 차별하지 않는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만 있다면야, 소설, 게임, 영화, 드라마, 애니, 만화 등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고급 문화인지 서브 컬쳐인지도 상관없다. 이야기 섭취에 있어서는 굉장히 잡식성이고 소화력도 강한 편이다. 건강한 식욕의 소유자랄까? 


우선 소설 분야에서 예를 들자면,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 도스토옙스키,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소위 '고전 명작' 작가들도 좋아하지만 필립 K. 딕, 아시모프, 하인라인 같은 SF 작가들이나 러브크래프트, 애드거 앨런 포 같은 기묘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도 좋아한다. 기묘한 이야기? 카프카와 보르헤스, 마르케스에 열광하고, 테드 창이나 그렉 이건, 김보영, 미셸 우엘벡, 스티븐 킹에 감탄하지만 동시에 <공의 경계>나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같은 일본 라노벨 명작들이나 심지어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은 웹소설에도 찬사를 날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시대를 가리지 않는 미스터리 매니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하드한 장르물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알제논에게 꽃을 (이것도 SF이긴 하네)>, <슬픔이여 안녕> 같은 감성충만한 작품들이나 로알드 달, 김언수의 단편들 같은 유쾌한 소설들도 정말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허, 에도가와 란포의 음울, 폴 오스터의 침음, 온다 리쿠의 몽환, 그 모두를 사랑한다. 아, 진지하게 김용과 세익스피어가 동급이라 생각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을 쓸데없이 피곤하게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좋아한다. 그런 수준을 넘어서는 괴작들도 좋아한다. 예컨대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이라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은 전체가 한 문장이다. 이문열을 좋아하지만 박완서처럼 일상을 그리는 작가도 사랑한다. <버스트>나 <괴델, 에셔, 바흐>처럼 픽션을 접목시키는 데 성공한 탁월한 교양서들에도 환장한다. 아동 청소년 소설에도 열려있다. 철학 교수들은 엉터리라 욕하지만 <소피의 세계> 같은 철학 소설도 좋아하고 (소설로선 굿), <엔더의 게임> 같은 청소년 SF에도 감동한다. <늑대왕의 꿈> 같은 동물 소설, <촌도리노의 모험> 같은 곤충 소설도 말해 무엇하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이전에 '촌도리노의 모험'이 있었다는 걸 아는가? 물론 '개미'도 좋아한다) 심지어 페미니즘 소설조차도 이야기만 훌륭하다면야. 예컨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정말 명작이다. 


게임과 만화, 영화까지 언급하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오늘은 여기까지. 


이렇게 써놓으니 아무거나 처먹는 놈 같지만 나름 기준이 있다. 


1. 참신성: 플롯이든 캐릭터든 서술 방식이든 문체든, 아무튼 뭔가 참신한 데가 있어야 함 

2. 중층성: 이야기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으면 좋음 


사후적으로 정리해보자면 그렇다는 거야. 실제론 음미하는 순간 느낌이 오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되겠지. 


참신하면서도 중층적인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가 뭘까? 앞서 말한 대로 이야기 하기/듣기는 결국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의미 업데이트'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몸에 필요한 음식이 땡긴다, 뭐 그런 거겠지?  


이상 이야기에 환장한 <이야기사냥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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