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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Jul 06. 2024

스케치는 나의 힘

일상 그리기를 다시 즐기기로 결심

 올해부터 다시금 삶에 스케치가 깊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자유롭게 수업 주제를 정할 수 있는 주제 탐구 수업 시간에라도 학생들과 함께 스케치를 하고 싶어 '일상 스케치 저널’이라는 이름의 수업을 개설했다.

 학생들에게 휴대폰을 준비해 오라고 해서 자신이 수업 시간에 그리고 싶은 사진 이미지를 미리 갤러리에 담아 오도록 했고 매 수업 시간마다 스케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조금씩 알려주면서 다양한 스케치 재료를 제공해 선과 색의 사용을 보다 자유롭게 시도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수업 초반에 학생들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된 16절지 스케치북, 부드러운 펜선을 그릴 수 있는 검은색 라이너를 수업 예산으로 구입했다. 다행히 수업을 신청한 24명의 학생들의 실력이 좋은 편인 데다 약간의 온도차는 있겠지만 스케치하는 행위를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일반적인 수업과 달리 그릴 거리를 던져주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찾아서 그리는 방식이 편했던 어린 스케쳐들은 높은 몰입도를 보였다. 초반에 스케치에 관한 몇 가지 안내를 하고 난 뒤 나도 학생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스케치를 할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가 시간 내 끝낸 스케치가 생기면 학생들에게 참고 작품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림 그리기를 생활화시키는 방법으로는 스케치만 한 것이 없는 듯하다.

 십여 년 전 어린 아들들을 키우며 그림 그리는 일이 사치 같게만 느껴졌던 시절,  ‘창작 면허 프로젝트’라는 스케치 관련 책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그 뒤로 손에 잡히는 종이가 있으면 일단 그리기에 착수했던 생각이 난다. '에이, 그냥 그리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며. 손 가는 대로.

 학생들이 학교에 버리고 간 8절지 스케치북을 주워 들어 학교의 정원이나 교무실 모습 등을 슬슬 그리기 시작했고 퇴근 후에는 우리 집 꼬맹이들(지금은 징글징글한 십 대, 이십 대가 되어버린 아들들)과 함께 놀이터로 나가 아이들이 노는 동안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지키며 놀이터를 스케치하곤 했다.

가끔 야외 놀이터에 웬 아줌마가 쭈그리고 앉아 스케치하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던지 귀여운 아가들이 다가와 얼굴을 빼꼼 내밀어 그림을 구경하면서 말을 걸고는 했다.

 한동안 나의 스케치 관심사는 카페로 옮겨진 적도 있고 잡히는 대로 그리던 종이는 ‘트래블 저널’이라고 부르는 휴대가 간편한 하드 커버 스케치북으로 발전되었으며 한동안 나의 책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스케치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다 보니 검색을 통해 ‘어반 스케쳐스’라는 국제적이고 자발적인 스케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서울과 수원의 어반 스케쳐스 모임에 참석해서 낯선 스케쳐 분들과 함께 그린 재미난 추억도 있었다.


 그리고 싶은 주제가 정해져 있기보다는 길을 가다 멈춰 서서 풍경을 보듯 불시에 주제를 정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의 모습이 그림 소재의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스케치와 친해지기로 한 김에 그동안 많이 그렸던 풍경으로 소재를 한정 짓지 않고 지금껏 그리지 않았거나 드물게 선택해 왔던 소재들을 그리고 싶어졌다.

 즉석에서 생각나는 스케치 소재를 나열해 본다면,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인물, 마음에 드는 미술 작품 모사, 패션 피플, 좋아하는 책의 표지, 웹사이트나 휴대폰 화면, 꽃, 필통 속, 애정하는 소장품 시리즈, 색상을 변형시킨 다른 사람의 그림, 전시회 장면, 식사 메뉴 등..


초록 플러스펜으로 그린 나의 카오스 세상

 3월에 그린 스케치는 내 서랍 속 카오스 풍경이었다. 그나마 교무실 업무 환경 중 책상 위는 깔끔하게 해 놓는 편인데 서랍을 열면 판도라의 상자 열리듯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일과 시간의 내 생활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돌발 상황이 난무하는 멀티 태스킹의 현장이다 보니 어쩌면 혼란스러운 서랍 속 스케치는 정신없는 나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지만 사실 서랍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다.


  

 은근히 인물 스케치를 잘 그리지 않았던 것 같아서 두 명의 인물을 선정해서 그렸다. 평상시 유튜브 영상을 많이 보는데 내가 심리 분석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예능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알고리즘이 소개해준 인물 서장훈 씨. TV를 없앤 지 오래된 집이라 서장훈 씨를 화면에서 본 지 오래되었고 농구복이나 양복 입은 모습만 본 것 같은데 이 우스꽝스러운 분장 너머의 진중함이라니.

 짧은 내담자와의 대화 속에 긴 인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았고 각본인지 즉석인지 모르겠지만 어쭙잖은 동정대신 합리적인 조언을 해주는 서장훈 씨의 캐릭터가 호감으로 느껴져 '무엇이든 물어보살' 영상이 뜨면 즐겨보게 된다. 언니가 없는 나는 이 프로그램의 서장훈 씨 같은 언니(실제로 여장을 하고 출연하심)가 있으면 든든하지 않을까 상상만 해 본다.


 

 우리나라 여성 화가라 하면 현재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 최욱경 작가의 사진을 따라 그려 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본 이 분의 대규모 회고전이 좋았고 그때 산 아트굿즈 에코백을 현재도 닳도록 들고 다니고 있어 수시로 생각나는 분이기도 하고. 십 년 전쯤에는 우리나라 여성 화가들에 대해 몰라 신사임당이 나의 롤모델이 아닐까 싶어 강릉의 오죽헌을 찾아가 경건한 마음으로 신사임당 동상을 보고 같이 사진 찍은 적도 있다. 그 뒤로 천경자 작가에게도 관심을 가졌다가 동시대 작가인 양혜규 작가의 카리스마 있는 사진과 작품 스케일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몇 년 전 최욱경 작가의 표현적인 추상의 강렬한 색채와 선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에코백을 매는 빈도수만큼이나 그녀를 생각하고 당시 보았던 그림들도 함께 회상한다. 사진 속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총명해 보인다.


 스케치를 즐기고 또 즐기면서 학생들에게도 이 재미를 조용히 전파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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