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브리지 앞에서의 찰나 같은 느낌표
내 인생의 여행 중 가장 고된 대장정은 대학원 1학기 마치고 떠났던 34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신념으로 다리가 아프게 걸어 다녔고 유럽 대륙을 밤기차로 종횡무진하며 피곤한 일정 중에도 이것저것 알차게 보고 왔는데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냥 먼 타국에 가서 비싼 비용과 노력을 치르면서 사서 고생했던 젊은 날의 치기가 지금은 할 수 없는 마냥 즐거운 추억이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몇 년 전 해외여행 붐이 우리나라 안에 일기 시작했으며 대학교 3학년 때 우리 학과 친구들이 유럽 일주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나도 감히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어떤 안 좋은 일을 겪고 나서 우울감이 찾아와,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생각을 전환시킬 계기가 꼭 필요했고 나 홀로 여행에 대한 로망도 실현해 보고자 큰 마음먹고 유럽 여행을 추진했다.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같은 과 친구가 주선한 벽화 아르바이트에 참여하여 이틀정도 숙식하며 경주의 어느 호텔의 내부와 외벽에 석상 모양이라든지 대리석 무늬 등을 유화로 그리는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여행을 허락받을 당시 부모님께서는 의외로 딸의 결정에 별말씀 없이 찬성하셨는데 오히려 대학원 같은 과 선배 한 명이 소식을 듣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와서 유럽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혼자 가느냐고 말렸다. 내가 괜찮다고 계속 말하니 정 혼자 가려면 당장 잭나이프를 사서 가지고 다니라는 말을 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겁은 많지만 참 마음이 따뜻한 선배였던 것 같다. 천운인지 34일 동안 혼자 다니면서 위험한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았고(지나고 보니 위험한 일이 생길 뻔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세상일에 무지했던 나는 해맑게도 모르고 지나갔다.) 잘도 돌아다녔다.
런던은 나의 긴 유럽 여행의 첫 관문인 도시였다. 솔직히 유럽 여행 코스를 짤 때 영국은 아예 제외시킬까 생각할 정도로 관심이 없는 나라였는데 내가 알아본 유럽행 항공권 중 두세 군데 경유를 해서 20여 시간만에 런던 게트윅 공항에 도착하는 필리핀 항공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첫 여행지가 된 런던에서 관찰했던 단편적인 내용들을 모아 보면, 유럽의 도시치고 대도시여서 이국적이기보다 서울 느낌이 난다는 점,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지들이 많아 그것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한 점, 잦은 비가 내리고 하늘이 대부분 흐린 점, 다소 무표정한 얼굴의 행인들과 여기저기서 흔히 보이는 빨간색 체크,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영박물관과 인파가 무시무시했던 버킹엄 궁전 앞 근위병 교대식 등.
런던에 대한 관심과 사전 조사가 부족했던 탓에 런던에 도착해서야 가이드북(당시 가장 유명했던 '우리는 지금 유럽으로 간다'라는 책)을 뒤적거려 유명 관광지 몇 개를 선정했고 직접 가 보았다.
런던 여행객이면 누구나 가는 전형적인 코스인 타워브리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이드북을 안내자 삼고 길을 헤매다 도착했는데 타워브리지 실물을 보니 색을 산뜻하게 칠해놓아 조금은 놀이공원의 기구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바로 전에 지나쳤던 런던탑은 옛날에 감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라 색이 우중충해서 대비 효과가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운 좋게도 유람선이 지나갈 때 다리가 열리는 짧은 이벤트를 볼 수 있었으며 다른 나라 관광객들과 함께 감탄사를 외치며 잠시 동안의 이색적인 구경을 함께 즐겼다. 타워브리지 앞에서 인증샷을 촬영하고 멀리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인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본 뒤 돌아왔다. 런던 여행을 하면서 느낌표를 찍었던 순간인 타워 브리지가 열린 장면을 담아 온 오래된 사진을 보다가 작품에 적용하기로 했다. 초보 배낭 여행객답게 어깨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짐을 바리바리 채우고 돌아다녔던 나의 무거웠던 배낭을 떠올리며 큰 배낭 속에 풍경을 집어넣었다.
내가 유럽 여행을 하던 시기는 테이트 모던도 생기기 전으로(검색해보니 2000년도에 생김) 당시 런던에 내가 가고 싶은 미술관들이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내가 만난 배낭 여행객들로부터 피카디리 거리가 뮤지컬의 본고장이라는 것과 대영 박물관 안에 식민지에서 강탈한 유물들이 차고 넘쳐서 보고 나면 욕이 나올 정도라는 이야기 정도를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대영 박물관에 갔을 적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라의 개수가 너무 많은 데다 바벨론 유물의 기둥과 벽까지 뜯어와 거대한 전시실을 채운 모습을 볼 때 좀 너무하다 싶기는 했다.
나의 경우 현재 런던에 대해서 창의적인 현대 미술가들이 많이 등장했으며 열린 시선으로 예술을 바라보게 하는 도시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다시 유럽에 가게 된다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고전적인 걸작 미술을 보는 일만큼이나 우선순위를 가지고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 같은 현대 미술관들을 방문하고 뱅크시 거리를 거닐며 영국 미술의 동 시대성을 느끼고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