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의 폐허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로마는 어디를 다녀도 유적들이 있어 끊임없는 볼거리였다.
대학원 1학기 마친 여름 방학에 34일간 과감하게 혼자 배낭여행을 떠났던 나에게는 중요한 목표가 하나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화집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사진 속 곡선적이고 우아하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을 유럽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여행을 추진하게 했다. 세세한 계획 없이 떠났던 여행이라 중간에 만난 한국 친구들의 의견을 들으면 곧잘 여행지가 바뀌었고 애초에 갈 계획이 없었던 북유럽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서 가우디의 작품을 봐야 하는데 남은 일정이 짧아졌으며 꽤 남단에 있는 바르셀로나로 들어가기 전에 로마에 들러 하룻밤만 묵어야 했다.
누군가는 로마를 유럽 여행의 목표로 삼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바르셀로나로 들어가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기 때문에 남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유럽의 대표 관광지인 로마에 잠시 머물 뿐이었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쿠솃(couchette)이라는 접이식 침대 객실 기차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는 여정에 만난 객실 친구들은 이탈리아인 가족이었다. 나의 영어 실력도 변변치 못했지만, 그분들은 영어를 아예 못 하셔서 손짓발짓을 해가며 의사소통을 간신히 했다. 가족 중 3명은 로마, 2명은 피렌체에 산다고 하셨고 처음에 내가 일본인인 줄 아셨다고 했다. 친절한 분들이어서 내가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간이침대를 펴주시고 가방도 침대 위에 올려놓아 주셨다. 로마로 가는 길에 만난 그분들 덕에 이탈리아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로마에 도착해서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자그마한 유스호스텔을 구해 방에 짐을 풀다가 룸메이트가 한국 사람처럼 보여서 한국말로 말을 걸었더니 일본인이었다. 나는 런던 대영 박물관에 갔을 적에 일본 남자가 일본말로 말을 걸어온 적이 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며 일본인처럼 보이는 한국인과 한국인처럼 보이는 일본인이 같이 웃었다.
앞서 말했듯 로마는 거리를 걸어 다니면 보이는 것들이 거의 다 유적이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게 되는 곳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친구끼리 배낭여행 온 한국인 무리, 외국인 무리가 많았고 남자 친구와 같이 온 고등학교 동창, 벨기에서 만나 북유럽까지 동행했다 헤어진 한국 친구 다 마주친 만남의 도시이기도 했다.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이 컸기 때문에 로마 거리의 볼거리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보면서 지나쳤고 폐허 도시 포로 로마노도 그중 하나였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끔 밤에 오페라 공연을 열기도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도착한 시간인 해 질 녘에는 문을 닫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폐허의 잔해들을 감상하기만 했다.
20대의 나는 우울 질적인 경향이 다분해서였는지 낡고 헤진 석상, 이끼 낀 돌, 오래된 건물의 외벽 등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감동할 때가 많았고 폐허가 된 도시 속을 걸어 다니면 멋있겠구나 상상했는데 아쉬웠다..
아버지께서 포로 로마노를 그리신 수채화 두 점을 보면서 로마 여행을 할 때 하필 못 들어간 장소라 어떻게 그려 볼까 궁리했다. 스쳐 지나가며 먼 거리에서 찍은 뿌연 사진이 전부라 참고할 만한 나의 사진이 없어서 집에 있는 로마 관광안내 책자를 뒤적였더니 두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나온 사진이 있었다. 폐허를 볼 때 느껴졌던 나의 미감은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비장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련한 환영과 같은 존재들이 그 도시와 함께 그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무너진 돌들이 즐비한 도시와 고전적인 인물들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로마의 고전 미술 벽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관광안내 책자 안에 바티칸 궁전에 라파엘로의 방이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계승한 화가이니 그의 작품에서 폐허 속 주인공들을 발탁하기로 했다.
50호 큰 캔버스에는 ‘엘리오도로의 방’에 그려진 벽화 중 도둑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천사의 역동적인 모습을, 20호 작은 캔버스에는 <아테네 학당>으로 유명한 ‘서명의 방’에 있는 벽화 속 우아한 여인을 그려 넣었고 여인의 손에 시든 장미를 들려 주었다.
달려가고 있는 천사의 환영은 사라진 과거 용맹스러운 제국의 역사를 몸으로 표현하듯 강한 에너지를 뿜고 있으며, 여성의 환영은 고대의 아름다운 도시가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 모습을 애도하는 듯 꽃잎을 떨구는 꽃 한 송이를 든 채 거닐고 있다.
낡고 헤져 거칠어진 돌들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거친 붓 터치의 배경 위에 폐허의 잔해들을 그린 선, 그것들과 오버랩되는 고전 인물들의 모습이 내가 느꼈던 비장미를 조금이나마 반영하는 듯하다. 고대 로마 시대 사라진 도시를 소재로 하여 르네상스 시대 프레스코 인물을 그려넣은 21세기의 아크릴화 두 점이 탄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