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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Apr 17. 2023

아버지의 그림 속 고향 트미실

 팔십이 다 되신 우리 아버지 고향은 충청북도 진천의 트미실이다. 아버지 어린 시절에 속칭 깡촌이라 불리우는 곳이었고 할아버지께서는 과수원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일은 하지 않으시고 한량처럼 지내셔서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밑으로 6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는 대가족의 맏이로 태어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겠다는 꿈을 품고 성장한 소년이었고 홀로 있는 시간에는 문학 소설을 탐독하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모님 댁에 가면 아버지가 어릴 때 그리셨다는 그림이 액자와 함께 벽에 걸려 있는데 실력이 상당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성장하여 도시로 나가셨고 힘겹게 공고, 공대 공부를 마친 뒤 건축의 길로 들어섰다. 어린 시절 키워온 개척 정신을 세계 곳곳의 건축 현장을 누비며 마음껏 발휘하셨으며 그 결과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러시아 등의 불모지에 도시 하나를 뚝딱 건설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해치우셨다.

 이제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고 편찮으신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며 예전보다 훨씬 체구가 작아진 아버지.

건강이 지금처럼 안 좋기 전까지는 어린 시절 그토록 좋아하셨던 그림 작업을 하고 싶다는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미술 취미반을 수강하며 7년 가량 수채화 실력 기르는데 몰두하셨다. 아버지는 재능이 있어서 그림 실력이 일취월장하였고 그룹전, 아트 페어 등에 참가하거나 수채화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등 기간 대비 적지 않은 성취를 이루셨다. 아버지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활활 불사르시던 그 기간 동안 정작 서양화를 전공하고 전시회를 간간히 해왔던 미술인인 딸은 그림 작업에 허무감을 느껴 지속하냐 마냐 고민을 하면서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직장 업무는 한가할 날이 없었고 자식이 커가면서 관련된 고민과 일들이 끊이지 않기는 했다. 그러한 삶의 분주함이 허무감을 가중시킨 원인이라고 한다면 외부로 탓을 돌리는 비겁한 소리일까.

 그 딸이 몇 년간의 고민을 정리하고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7년 가량 즐겁게 작업을 이어오신 아버지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을 오마주하는 작업을 통해 작업 스펙트럼을 넓히기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전시도 연다면 어떨까 궁리하게 되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시점은 아버지의 건강이 더 안 좋아져서 장시간 앉아서 그려야 하는 작업을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부모님댁에 가서 아버지의 수채화 작품들을 함께 꺼내 보니 세계 곳곳의 명소들, 우리 나라 도시, 자연 등을 소재로 그린 풍경화들이 마루를 빼곡하게 채웠다. 그 중에서 시골의 어느 농가를 그린 그림은 진천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고 하셨는데 도통 농촌에 대한 향수라고는 모르고 자란 나의 눈에 시골을 상투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보여 공감되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초가집과 장독대, 담벼락 옆의 해바라기들이 화면을 채우는 평화로운 농가 풍경 그림. 


아버지가 생각하는 시골 풍경은 바로 이런 것. 아버지가 그리신 수채화.

 진천 시골에서 어린 시절 꿈을 키워 왔던 아버지 눈에는 한없이 그립고 정겨운 풍경이었겠지만 농촌에 대한 감성 지수가 제로에 가까운 내가 이 그림을 오마주한다 해도 시골에 대한 향수를 그저 추측해서  모방하는 것 이상은 하기 어려워 보였다. ‘아무래도 시골에 가봐야겠다. 그러면 뭐라도 느낌이 생기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스케치 전시 때 의기투합했던 기획자님과 함께 진천의 트미실 마을을 답사하기로 했다. 



 

  그곳을 15년전 마지막으로 찾으셨다던 아버지는 딸이 당신의 고향 트미실에서 가서 아버지 5살 아기였을 때 빠져 죽을 뻔 했다가 구출되었다는 우물도 찾아보는 등 여기저기 견학하려 한다고 전화로 알려드리니 덤덤한 목소리에 작은 기쁨의 감정이 묻어 나왔다. 우리가 트미실을 가기로 한 날 오전에 직접 마을 세부 지도까지 손으로 그려서 카톡으로 보내주셨다.

 12월 초 토요일 아버지의 고향 트미실 마을을 찾은 날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지만 눈비가 오지 않아 시골길을 걸어다니기에 나쁘지 않았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우물은 금방 찾았는데 이미 우물의 형태는 사라졌고 우물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작은 터만 남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예측하지 못했던 풍경이 존재했다. 



검은 코끼리와 소의 형상이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폐파이프, 플라스틱 호스 등을 엮어 동물 형태로 만들고 시골에서 흔히 보는 검은 비닐을 씌운 누군가의 정크 아트 작품이었다. 시골 우물터에서 우연히 만난 익명의 작가의 공공 조각이 뜻밖의 시각적 즐거움을 주었다. 그동안 시골은 명절 등 특별한 날만 가는 낯선 장소였고 서울 토박이 어린이에게 어색하고 불편한 곳이었다면 중년이 되서 다시 찾은 시골에서 얻은 첫인상은 엉뚱함, 발랄함이었다.

 

 아버지께서 전화로 설명해 주신대로 트미실 마을에는 작은 방죽이 있었는데 그 주위를 마구 자란 갈대와 억새풀 등이 두르고 있는 가운데 방죽 울타리 위에 있는 또 다른 거리 미술가의 창작물이 눈에 들어 왔다. 방죽 주위 울타리 기둥 위에는 작은 철판을 자르거나 구부려서 만든 새의 형상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키치한 정크 아트 덕분인지 시골 트미실이 예술 공간처럼 느껴져 아버지의 고향 마을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정보에 따라 큰할아버지 소유의 논밭과 도랑을 구경하며 한참을 걸어 언덕을 넘었고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관리인만 거주한다는 현대식 건물에 도착했다. 기획자님과 두런 두런 대화하며 언덕길을 걷는 동안 황량한 갈색의 들판과 마른 풀 사이 소리내며 흐르는 도랑을 보며 아련한 시골 내음을 맡았다. 큰할아버지 댁에 도착하니 컹컹대는 두 마리의 개가 우리를 그리 반갑지 않게 쳐다 보아서 개를 무서워하신다는 기획자님이 당황하셨고 목줄도 안한 개들이 우리를 향해 계속 전진하는 통에 허둥지둥대며 잰걸음으로 우물터 방향으로 돌아갔다.

 기획자님과 이야기하며 시골길을 걸었던 편안한 시간이 잔잔한 로드무비 같았다면 갑작스런 개들의 출현은 드라마틱한 클라이막스 쯤 되겠는데 당시에는 물리는 건 아닐까 싶어 겁나기도 했다. 비교적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 내가 냅다 호통을 치니 개들이 움찔하고 놀라 도로 들어가버려서 다행이었다.


 언덕을 바삐 내려가 우물터와 방죽으로 되돌아간 뒤 다시 트미실 마을 탐사를 이어나갔다.

 이 마을의 주요 기념지인 이영남 장군묘까지 걸어갔는데 그 분은 이곳 진천의 트미실 출신의 장군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라 한다.

 

 묘지 옆에는 자연이 만든 예술 작품이 있었는데 소나무 위에 상수리나무가 포개진 채로 함께 자라는 '연리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던져 이순신 장군을 지킨 충신이었던  이영남 장군을 소나무에 죽어가는 부하를 위해 생명 같은 갑옷을 벗어 덮어준 이순신 장군을 상수리 나무에 비유하여 두 사람이 환생한 나무라는 설명을 적어 놓았다. 옛 사람들은 특히 충절의 가치를 높이 사서 지금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의 가치를 높이 사듯 고귀한 것으로 숭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자연의 작품을 보다가 '잘 자라고 있던 소나무에 별안간 상수리나무가 딴지를 걸어 얽힌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삐딱한 블랙 유머를 섞어 멋대로 해석을 해보기도 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과수원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지만 어릴 적 시골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가 직접 수확하셨다는 과일을 얻어먹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과수원집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했다. 막상 과수원이라는 장소에 와보니 아버지와 나의 삶의 원류와 관계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길 옆을 따라 있는 사과 과수원 나무들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몇 그루 촬영했다. 사진들을 보니 사과 나무 가지들이 허공에 만들어내는 선이 자유분방한 드로잉 같아서 누군가 사과 나무만 주제로 사진이나 그림 작업을 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인간이 걸어가는 형태의 이미지가 우연찮게 얻어걸렸다. 


 



  어린 시절 시골을 찾아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사촌들과 어색한 만남을 가진 뒤에 옹기종기 큰 상에 껴앉아 말없이 밥을 먹던 명절은 이제 흐릿한 흑백 사진 같은 기억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당시의 나보다 내 아들들의 나이가 더 많아진 시기가 되어 시골 마을 트미실에서 다녀온 중년의 내가 얻어온 시골의 느낌 몇 자락을 읊어본다. 평온한 겨울 들판 풍경과 익명의 거리 예술가가 나이브하게 만든 정크 아트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충신을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조상들의 자부심 등 선물처럼 담아온 기억들을 모아 조만간 나의 새로운 그림을 시작해야겠다.


 아버지와 통화할 때 수화기를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나에게 잔잔히 전달되었듯, 시골 공터에 폐품으로 동물을 만들어놓은 누군가의 재치가 행인들을 피식 웃음짓게 했듯, 나의 새로운 작품에 잔잔한 향수와 소소한 상상력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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