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경복궁 야간 개장
이 이벤트의 발단은 아버지께서 그리신 경복궁 후원 그림을 보고 그것을 오마주하여 내 그림을 그려 보겠다고 마음 먹은 일이었다. 그림 속 장소가 경복궁에서 어느 위치인지 찾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경복궁 야간개장 공지가 뜬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예약창에 들어가 보았다. 전체 매진이라 인기가 대단하구나 생각하며 포기하려던 순간 내가 갈 수 있는 날의 회색 숫자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한 명의 예약자가 취소한 자리가 나의 것이 되었고 직장 업무가 일찍 끝난 10월의 어느 날 저녁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경복궁으로 출발했다.
10월 중순의 저녁 날씨는 이른 추위가 찾아와 쌀쌀했다. 지하철을 타고 3호선 경복궁역에 도착해 경복궁 방향 출구로 나가니 국립고궁박물관 앞 광장까지 지하 복도로 연결이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 놀라웠다. 계단을 올라 광활한 광장에 서있으니 사방에는 박물관, 인왕산, 도시의 야경, 경복궁 입구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졌고 하늘은 푸른 구름이 보일락 말락하며 밤을 부르는 색채였다. 궁의 입구를 향하여 이동하는 동안 내 속에서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경복궁 입구에 현장 발권을 기다리는 끝없는 줄이 보여 당황했지만 운 좋게 예약 막차를 탄 사람이라 예약자 줄에 서서 금새 들어갔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여기 저기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보여 과거의 세계로 들어 간 듯 신비한 기분에 젖음도 잠깐, 밝은 조명으로 치장해 보석 같이 빛나는 궁궐 건축들이 나의 시선을 장악했다.
입구에 서면 중앙에 보이는 근정전에 이르니 임금의 어좌와 그 뒤를 굳건히 지키는 ‘일월오봉도’가 눈길을 끌었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과 화려한 단청 장식이 우리 나라 대표 궁전의 중앙 로비다운 위용을 보여 주었다. 일월오봉도와 어좌가 잘 보이는 정면은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인증샷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기 장소라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왼쪽 측면으로 돌아가니 가까운 데서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웅장한 인테리어가 펼쳐진 모습이 경이로웠다. 경복궁을 찬란한 실내 장식으로 꾸몄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화려함 때문에 감동해 보기도 오랜만이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용을 그림이 아닌 황금색의 입체 부조로 설치한 천장을 조명이 비추고 있었는데 최고 통치자의 위엄을 반영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근정전에서 경회루로 걸어갈 때는 내가 마치 시간 여행자로 변신해 밤에 옛 궁궐 속을 헤매는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이름 중 마지막 글자인 한자 '성'이 별을 의미하다보니 어디를 가든 남모르게 별이 있나 찾는 습성이 있어 날렵한 한옥 지붕의 곡선들이 만나는 지점에 반짝이는 별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을 때 반갑기 그지 없었다.
드디어 경복궁 야간개장의 인기 장소인 경회루에 당도하니 연못을 감싸는 겹겹의 인파가 저마다 멋드러진 셀피를 연출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들을 헤치고 들어가기 어려워 자연스럽게 인증 셀피는 포기하였고 어떻게든 경회루의 좋은 야경을 담겠다는 여러 앵글의 노력이 나름 만족스러운 사진을 남겼다. 호수에 대칭으로 반영되는 경회루의 그림자와 수생 식물들이 물결에 살살 흔들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진에 담아갈 수 없는 현장의 운치는 마음 속에 넣어 두었다.
경복궁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애초에 찾게 된 목적인 ‘그림 속 풍경을 찾아서’가 떠올라 아버지의 수채화에서 본 인왕산 각도와 비슷한 산의 형태가 보이는 방향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아쉽게도 그곳은 조명이 설치되지 않은 어두운 장소인데다 지킴이들이 길을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계셔 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그림 속 장소를 답사하고 영감을 얻으려는 것이 방문 의도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나중에 한 번 그려볼까 하는 심정으로 고풍스러운 경복궁 야경이 현대 도시 야경과 공존하는 사진을 몇 컷 남겼다.
2시간 반 가량 빛나는 보석 같은 궁궐의 정경에 취해 돌아다니느라 경황이 없었는지 집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경복궁역으로 향할 때가 되서야 이른 추위에 떨었던 피로와 배고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귀가하는 동안 소비할 힘을 축적하기 위해 지하철역 옆 편의점에 서서 까먹은 반숙계란 2개와 온장고에서 꺼낸 두유는 어쩜 그리 따뜻하고 맛있던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포만감과 함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뿌듯함이 서서히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