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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May 01. 2023

백조의 성

아버지와 딸이 본 각자의 노이슈반슈타인성

 

 아버지와 딸은 독일의 강대했던 영화의 산물인 어느 성으로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갔고 다른 느낌을 받고 왔다. 두 사람이 보고 기억하는 성은 너무도 달라서 두 개의 성이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그 성은 백조의 형상에서 따왔다고 해서 백조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종종 불리우는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성이다.


아버지가 사오신 관광책자 속 노이슈반슈타인성

 출장 중이던 사십대 중년의 아버지가 여가 시간에 시간을 내서 방문한 그 성은 바그너의 음악에 얽힌 일화와 함께 서구 사회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문화를 대표하는 낭만적인 장소였다.

 배낭여행간 이십대의 딸에게 그 성은 화사한 엽서 사진 속에나 존재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실물을 보고 싶어 찾아갔지만 추적추적 비내리고 스산한 날씨에 일회용 비옷을 입고 떨면서 등산했던 낭만, 우아와는 몇 광년 떨어진 장소로 기억되었다.


 아버지는 성 안으로 들어가 백조 형태로 빚은 도자기를 포함한 형형색색 장식물들이 놓인 화려한 회당을 그 시대 사람이 된 듯 상상하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왕의 거처를 장식하는 예술 작품들의 정교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을 마음 깊이 담았고 다양한 앵글로 촬영한 성의 모습이 담긴 관광책자를 구입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다.

 딸은 동전 하나까지 세어가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배낭여행자답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내부 관람을 과감히 생략했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친 몇 살 아래의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장대비를 뚫고 성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인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찾아 언덕을 올랐다.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산 밑에서 뽀얗게 솟아오르는 물안개 속에 있는 백조의 성을 보며 딸은 자신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비를 맞고 있는 현실 속 성의 모습이 왠지 측은해 보였고 비를 맞아 축 늘어진 가련한 백조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행 당시에 끄적였던 글이 있어서 인용하자면,


 다리에서 본 성의 모습은 눈에 익히 보아왔던 터라 놀랍지 않았지만,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젖은 채로 현실 속에 우뚝 서있는 모습에 정이 갔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의 급류나 솔솔 피어오르는 안개 그에 비해 묻혀버리는 먼 평야. 한참 성을 보고 있노라니 안개에 의해 성 이외의 배경이 모두 하얘졌다.'

 

<백조의 성> 72.7 x 90.9 cm acrylic on canvas 2024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린 커다란 백조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유럽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하나둘씩 사오신 크리스탈 장식품의 형태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거실의 유리 장식장에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오신 온갖 신기한 물건들이 있었다. 중동 지역 출장 시절에 바닷속에 들어가서 직접 따오신 산호들, 조명에 비추면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장미석이라는 돌, 낯선 나라의 이국적인 전통 공예품 등. 나는 그 중에서도 유럽에서 사오셨다는 크리스탈 장식품들의 각진 보석 같은 광채와 도드라진 형태감이 마음에 들어 혼자 있을 때면 꺼내서 자세히 보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크리스탈 조각을 제작한 모 회사의 상징이기도 한 크리스탈 백조의 형태가 내게 가장 신비롭게 다가왔다.  어린 소녀에게 크리스탈로 된 백조는 가보지 못한 유럽이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출발점이자 동화적인 상징물 같은 것이었다. 그 백조와 이십 대 배낭여행자의 시간 속 성의 모습을 오버랩시킨 작품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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