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by 햇별


무더위가 끝나지 않고 꼬리를 이어가던 작년 8월 중순, 책을 사랑하는 친구로부터 부커상 수상작인 서맨사 하비의 소설을 선물 받았다. 지구를 떠나 우주정거장에서 미지의 세계인 우주를 탐험하며 하루에 16번의 궤도를 돌고 도는 우주 비행사들의 삶과 사색을 기록한 비범한 소설이었다. 푸른 바탕에 우주 공간과 궤도의 형태를 감각적인 분홍색 이미지로 그려낸 책의 표지가 예술 작품 같아 보이는 책이었다.

어서 여름이 끝나기를 지겨운 항암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지쳐있던 당시 나에게 우주 비행사들이 고립 속에 갇혀 있는 삶에서 느꼈을 답답함이 유독 강하게 느껴져 공감이 되었다. 친구의 책선물에 대한 고마움에 서평으로 반응하고픈 마음이었지만 수많은 아름다운 문장들에 담긴 섬세한 감각들에 대해 감히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나는 갑갑한 상황에 매몰되어 감각은 무뎌지고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접하는 듯 생각이 둔탁해진 상태였다.

책선물이란 친구가 나에게 건네는 대화 같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읽으면 더 깊이 느낄 것 같다는' 친구의 칭찬 같은 책 추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감을 전하지 못한 채 수술과 이어지는 치료들을 받으며 시간을 훌쩍 흘려보냈다.


겨울이 되어 이 책을 재독 하며 다시금 우주 비행사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각각의 과거의 추억들과 우주 비행을 하면서 느끼는 소회들, 시시각각 변하는 광대한 우주의 풍경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을 감정들에 공감해 보았다.

6인의 비행사들이 극도로 제한된 무중력 공간에서 최고의 자제력을 발휘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붙들며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해나가는 모습은 존경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꾸어온 꿈을 이루었으며 특별히 선택받은 인류의 대표로서 활동하는 그들이 우주 정거장에서 사는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그렇게 척박해 보이는지. 우주복을 입고 산소를 아껴서 호흡하며 벗어나면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금속안에 갇혀 파묻힌 듯 살아가는 삶. 무중력 상태에서 다리를 쓰지 않아 근육의 힘이 빠지고 척추는 늘어나고 시력도 약해지는 등 극단적 신체 변화를 겪으며 고향과 가족을 떠나 고립된 생활을 하는 그들을 보며 오랜 꿈을 이룬 사람들의 삶이 처절하고 외로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은 너무나 경이롭고 아무나 겪을 수 없는 희귀한 것들이기에 고귀한 삶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극악의 불편함을 인내하는 대가를 치르는 삶.


작가는 그들이 우주비행을 하며 얻은 가장 고귀한 선물인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이 시각적인 시와 같은 언어로 여러 지면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지구를 읽으며 상상하다 보면 나도 그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열망이 싹튼다.

거대하고 웅장한 구체의 행성인 지구 표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움직임들을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듯, 작가는 각양각색의 색상을 언급하고 비유를 아끼지 않으며 애정을 담아 써 내려간다.

나에게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그 사랑이 곧 지구에 사는 인류에 대한 그리고 작가 자신을 향한 사랑의 제스처로 전해졌다. 지구는 우리가 태어난 고향이고 우리의 원류이므로 결국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 존재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 비행사들이 진실을 거슬러 지동설을 믿고 싶을 만큼 지구에 대한 절절한 사랑고백을 하는 부분이다.


가끔 지구를 보고 있으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지우고 저 행성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신이 왈츠를 추는 우주 한복판에다 저 행성을 떨어트린 것이라고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메아리친다. 그 아름다움은 메아리이고 울려 퍼지고 노래하는 빛이다. /50-51p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위의 문장의 마지막 부분처럼 공감각적인 표현을 발견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햇빛이 심벌즈 소리처럼 챙챙 요란하게 퍼진다. /214p
윤이 나는 구슬 행성은 잠깐이지만 아주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 지구의 빛이 합창한다. /218p


또는 자연의 변화를 의인화시켜 인간이 하는 움직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밤이 지구의 푸른 직물을 풀어헤친다. 219p


문장 하나하나가 시적이고 예사롭지 않아 어떤 문장은 따로 떼어내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독특한 예술 작품이 나올 것만 같다.

지구 주위를 돌며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보고 나라와 나라를 지나고 지구 표면의 변화를 관찰하는 이 이야기 속의 궤도는 마지막 표지를 덮는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돌고 도는 우주의 궤도로부터 지구로 돌아온 인간은 하루, 한 달, 일 년, 평생 동안 반복, 순환하는 삶을 살게될 것이고 그러한 인간의 삶들이 지구에서 계속될 테니 말이다.

작가는 열여섯 번째 공전 궤도를 돌았을 때 이야기를 맺는다.

이 책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인류의 꿈과 소망을 대표하는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의 시선으로 그린다. 지구상의 각 대륙과 나라들, 자연의 변화와 우주의 역사 등 작은 책 속에 담긴 거대한 내용을 읽으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빠르게 훑듯이 적어낸 여섯 인물의 심리와 그들의 기억이 만든 이야기들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숨가쁘게 지나갔다. 궤도를 빠르게 회전하는 그들의 모습처럼.

우주 공간을 떠도는 인물들의 삶과 우리의 별 지구의 모습을 수려하게 그린 다차원적 묘사가 매력적인 문장들이 눈부신 실이 되어 신비로운 직물을 직조하고 있다.


책에 대한 인상을 수채화로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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