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by 햇별

한 달에 한 번 친한 선생님들과 만나온 소중한 8년 차 독서모임에서 1월의 도서로 함께 선정해서 읽고 대화 나눈 책은 <작은 땅의 야수들>. 워낙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책이라 도서관에 갔을 때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겨우 손에 넣은 책의 표지가 꽤나 낡은 것으로 보아 이미 많은 독자들의 손을 거치며 사랑받은 듯했다.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 작가는 저축했던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맨해튼의 값싼 월세 집에 틀어박혀 글을 쓰던 중 어느 함박눈이 내리던 날 설경 위의 사냥꾼 이미지가 떠올라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6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면서 작가의 데뷔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미국인에서 자라 한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생소했을 텐데도 스스로 방대한 자료를 찾아 연구하여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소설을 창작할 각오를 했다는 점이 대단해 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꾸준히 우리 역사를 배워온 나도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란 시험을 대비해 암기했던 단편적인 지식의 집합에 불과해 큰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 김주혜 작가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들의 삶과 역사적 사실을 결합시켜 이렇게 잘 짜인 소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파란만장한 기생으로서의 인생을 살며, 삶을 통째로 바치는 정호의 사랑을 받고 또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절절하게 한철을 사랑하는 옥희라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녀의 시선을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겪었던 슬픈 삶을 비쳐 주고 있다. 당시 역사를 찾아보면 기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소설 속에는 기생 조합인 권번들을 연합시켜 독립운동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삼일절에 태극기를 들고 직접 나섰던 단이라는 의로운 기생의 활동이 등장한다. 그런데 단이는 일본인 치안판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약점이 있었으며, 요강도 없이 감옥에 방치되어 용변으로 더러워지는 인간 이하의 일을 겪으면서 회의감에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당시 단이과 같이 일본인 후견자를 두지 않았다면 독립 운동가들을 도울 정도의 물질적 능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며 누구라도 인권이 위협되는 상황에 처한다면 조국을 위하던 의로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가 생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식민지 피지배인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군의 만행 장면이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특히 우리 독서모임의 외동딸을 키우는 선생님은 초반에 나온 은실의 귀한 딸 월향의 수난 장면에 치를 떨며 가장 참혹했다는 감상을 말씀하셨다. 일제 강점기 역사를 보면 유난히 여자들에게 잔혹했던 장면들이 많다. 그 이후로도 일본군들이 한국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학대하거나 쉽게 죽이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아마 과거 유럽 열강이 남미와 아시아에 식민지에서 행했던 비인간적인 행태들도 이랬을 것이다. 한 선생님은 인간이 식민지 지배를 하며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잔인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학대의 대상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왜곡된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 대하듯이 보았던 왜곡된 시선이 독일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스페인의 남미 원주민 국가들에 대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우리 민족에 대한 끔찍한 만행을 계속해서 만들어 온 것이겠구나 했다.

이 소설 속에는 살아 숨 쉬는 듯 묘사된 인간적인 모습들이 당시 비인간적인 시대 상황을 관통하며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조건 없는 사랑을 퍼주는 사람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비참한 상황에도 긍지를 가지고 눈동자에 삶의 에너지를 담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가볍게 배신하는 사람들, 격변기에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여 행운을 누리면서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얀 눈발 날리는 평양의 산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마지막에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제주도에서 끝을 맺으며 우리나라의 산천을 종단으로 타고 내려온다. 우리의 주인공 옥희는 노년에 해녀가 되어 사랑스러운 아기 철수와 함께 제주도 푸른 바다에서 평화로운 호흡을 한다.

산, 구름과 물을 민화풍의 선으로 그린 뒤 그 사이사이에서 기생, 독립투사, 일본군, 호랑이 등이 조그맣게 모습을 드러내는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정지아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 라고 쓰여 있다.)이 인상적이었는데 소설 속 이야기를 잘 표현한다. 본래 '몽유도원도'같이 전통적인 산수화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며 시공간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한국적 화풍의 이 일러스트레이션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진행되며 이야기의 흐름, 평양에서 제주까지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사냥꾼과 호랑이가 등장하며 사냥꾼은 아들에게 호랑이를 죽이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만 해야 한다고 단단히 이른다. 우리나라 국토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험한 산들이 많아서일까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영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맹수, 호랑이들이 꽤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작가는 우리 조상들과 함께 살았던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멸종당한 호랑이라는 존재가 압제 속에 강인함은 잃지 았았지만 슬픈 역사를 살았던 우리 민족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던 우리의 역사를 소설로 만날 때면 역사적 상황이 만든 슬픔이 워낙 커서인지 등장인물들이 겪는 굴곡진 삶의 이야기와 더불어 강한 애수를 느끼게 된다. 21 세기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민족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정치적 행동을 하며 목숨을 바쳤던 분들들의 순수한 뜻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태어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소설을 통해서나마 그분들의 숭고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대하소설을 읽고 나면 책의 부피도 그렇지만 긴 호흡의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가슴에 남은 먹먹함이 한동안 떠나지 않곤 하는데 그것이 대하소설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재작년에 읽었던 김영하의 <검은 꽃>, 몇 년 전에 읽었던 이민진의 <파친코> 등도 비슷한 여운을 남겼다. 또한 세 소설 다 한 번 잡으면 놓기가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페이지터너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요즘 급격히 찾아온 노안 때문에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있었는데 독서모임이라는 소중한 기회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운 대하소설을 읽고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은 것 같아 감사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이야기의 짜임새도 탄탄하지만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들이 종종 보여 문학 작품을 대하는 미적인 즐거움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이 괜히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이 아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