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미스터리> <넥서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실재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객관적 실재이다. 객관적 현실이란 나무, 돌, 산, 태양, 공기와 같이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주관적 실재이다. 주관적 현실이란 기쁨, 즐거움, 슬픔, 안타까움, 사랑처럼 개인이 느끼는 인지적 감정이다.
이 두 가지는 적어도 지구상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있어 적용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세 번째 현실이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인간이 이야기라는 도구를 발명하면서 탄생한 새로운 차원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인간과 무관한 객관적 실재나 개인의 감각에 의존하는 주관적 실재와는 달리 여러 사람들의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상호주관적 실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우리가 아는 돈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객관적 실재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돈은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종이 또는 금속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종이를 통해 먹고, 마시고, 입고, 편안한 곳에서 잘 수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나와 음식점 사장님, 카페 사장님, 옷 가게 사장님, 아파트 소유자가 1만 원이라는 종이 쪼가리에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 중 한쪽이라도 동일한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거래는 성사될 수 없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태양과 달은 존재하고(객관적 실재), 종이에 베인 손가락에 통증(주관적 실재)은 존재하지만,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상호주관적 실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상호주관적 실재에는 신, 국가, 법률, 화폐, 인권, 법인(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세금을 낸다) 등이 포함된다.
상호주관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한다면 상호주관적 실재는 소멸된다.
1985년 11월 3일 미얀마 정부가 25 차트, 50 차트, 100 차트짜리 지폐는 더 이상 법정 화폐가 아니라고 한 순간, 지폐는 객관적 실재인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1991년 12월 8일 오후 2시 맺어진 벨라베자 조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22년 연방조약에 서명한 소련의 창립국들인 우리 벨라루스 공화국, 러시아 연방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국제법의 적용 대상이자 지리적·정치적 실재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밝힌다."
그렇게 펜 놀림 한 번으로 미국과 권세를 다투던 소련은 사라졌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서로가 소통하며 그 이야기를 같이 믿을 때(신뢰자산) 비로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책 <자본의 미스터리>에 따르면 가난한 나라는 자산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느 국가이든 간에 적어도 '토지'라고 하는 부동산은 존재한다. 그러나 부동산이라는 객관적 실재를 소유권이라는 상호주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상호주관적 실재가 명시적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서울에서 발급한 등기부등본을 부산에 가져가서 보여줘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소유권이 인정된다면 부산에서도 해당 자산을 바탕으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의 인정 범위가 없거나 적은 국가들은 거래를 하는 데 있어 분쟁과 비용이 발생한다.
만약 서울에서 발급한 등기부등본이 부산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면, 부산에서 그 자산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서류에 대한 절차가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등기부등본이라는 개념이 서로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내가 집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 집이 누구의 소유인지는 불명확하다. 어제는 A의 집이었지만 거래를 통해 B의 집이 되었다고 한들, 집의 형태는 동일하다.
자산이란 그 집 자체가 아니라 '소유권'이라는 합법적이고 명시적으로 문서화된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이러한 개념을 통해 담보를 지거나 임대 계약을 하며 자본은 더욱더 늘어난다.
상호주관적 실재로 진입한 재산 체제는 자산의 경제 속성을 파악하는 비용을 줄여 더 많은 자산을 창출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 눈으로 보이는 집이란 객관적 실재를 소유권이라는 상호주관적 실재로 분리하면 강력한 힘을 얻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들은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를 잘 창조해 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새로 건설된 건물이나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뿐 아니라 주식과 채권을 거래하고 컴퓨터 속에만 존재하는 주소(홈페이지 등)와 게임 아이템을 거래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어쩌면 상호주관적 실재를 새롭게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