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추악한가?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존재이다.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과 새의 몸을 가진 이 괴물들은 이탈리아 서부 해안에 살며 바다를 지나는 선원들을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유인했다.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암초 지역으로 유인된 배는 난파되어 많은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으로, 트로이 목마를 고안하여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가 있었다. 그는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세이렌이 살고 있는 해역을 지나야만 했다.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로부터 세이렌의 위험성을 경고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단단히 묶어 놓고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자신을 풀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취해 자신을 풀어달라고 소리쳤지만, 부하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결국 세이렌의 유혹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세이렌들은 절망하여 바다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악(惡)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악마의 모습이 사실 악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악마의 진정한 목적은 매력적인 모습과, 매력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하는 데 있다. 유혹하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스스로 죽은 세이렌을 보라.
우리가 악(惡)이라는 것을 평가할 때 종종 이런 통찰을 간과한다. 사후적으로 평가했을 때, 악(惡)은 명확히 나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악(惡)이라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점은 특정 시점에서 악이 얼마나 유혹적이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中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사를 저지른 파시스트를 생각해보자. 파시즘은 현시점에서 악(惡)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파시즘의 병폐를 이야기할 때 놓치는 핵심은 그것을 단지 추악한 괴물로만 묘사하고,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시즘이 얼마나 매력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빠질 수 밖에 없었나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파시즘을 나쁜 것이라 배웠어. 그러니 내가 파시스트적인 생각을 할 리가 없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문에 의해 여러 제재와 현재 가치 약 205조 원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이 부과되었다. 독일은 어마무시한 배상금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외화를 벌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승전국들은 독일 공장의 생산 기계를 직접 뜯어가는 등 그들이 돈을 벌 수단을 없애버렸다.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찍어냈고 유래없는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실업자가 넘쳐흐르고 파업과 시위로 시끄러운 나날들이었다. 혼란과 불확실성에 빠진 독일 국민들에게 파시즘은 아주 명확한 잣대를 주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막대 다발'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facis'에서 나왔다. 막대 한 개는 부러뜨리기 쉽지만 그것이 모이면 부러뜨리기 어려워진다. 각 개인은 유약하지만, 개인이 뭉쳐 집단이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파시즘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파시스트에게 좋은 예술은 민족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파시스트에게 좋은 교육은 민족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혼란만 가득했던 사회에 너무나도 명확한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한 파시즘은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있어 매력적으로 들렸다.
악(惡)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고 시간이 경과되어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명백하게 악(惡)이라 판명되는 일에도 우리는 그것이 당시에 얼마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을지를 간과하면 안된다. 우리 사회에서 매혹적으로 들리는 것들이 후대에 악(惡)으로 판명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