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앞에 1부터 9999까지 숫자가 적힌 카드가 무작위로 놓여있다. 당신은 그중에 한 장을 임의로 골라 숫자를 확인한다. 선택한 카드의 숫자에서 가장 앞자리에 쓰여 있을 숫자는 당연히 1부터 9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앞자리가 되는 수는 1부터 9까지 확률적으로 1/9, 약 11%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숫자에서는 맨 앞자리에 오는 숫자의 확률이 모두 동일하지 않았다. 예컨대 미국의 도로 번호, 회사의 회계 장부, 경제 지표들에서 나타나는 숫자들, 전 세계 각국의 인구수를 분석해 보면 첫 자리 수가 1일 확률은 무려 30%나 되었다.
1881년 미국의 천문학자였던 사이먼 뉴컴은 수학에서 사용하는 로그표에 값을 관찰하며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로그표는 계산기가 없던 시절 사람들이 로그의 값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했던 책이다. 그런데 이 로그표가 담긴 책 앞 쪽 페이지가 뒤 쪽 페이지보다 더 많이 닳아 있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1로 시작하는 로그 값을 더 많이 찾아보았다는 의미였다. 우연인가 싶어 다른 로그표가 담긴 책도 살펴봤지만 역시나 앞 페이지가 훨씬 닳아있었다.
1938년 미국 물리학자였던 프랭크 벤포드(Frank Benford)는 이례적인 숫자들에 관한 법칙(The Law of Anomalous Numbers)라는 논문에서 벤포드의 법칙을 발표한다. 그는 물리학 상수, 강의 너비, 분자 중량 등 다양한 데이터 세트로부터 첫 자리 숫자의 분포를 연구했다. 그는 이런 데이터에서 첫 자리 숫자의 분포가 특정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우리의 직관인 11%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다.
맨 앞자리 숫자가 될 각각의 확률은 1이 가장 높았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확률이 낮아졌다.
1 : 30.1%
2 : 17.6%
3 : 12.5%
4 : 9.7%
5 : 7.9%
6 : 6.7%
7 : 5.8%
8 : 5.1%
9 : 4.6%
스포츠에서 농구 선수의 평생 득점, 태권도 선수가 시합에서 한 발차기 횟수, 배드민턴 랠리 수, 야구에서 타자의 득점 수도 벤포드의 법칙을 따른다고 한다. 심지어 19,500개의 미국 도시의 인구수를 취합해 보니 벤포드의 법칙을 따랐다.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조작된 사진을 판별하는 데도 벤포드 법칙을 썼다. 디지털 사진 파일은 수백만 개의 작은 숫자 값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값도 벤포드의 법칙을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포토샵과 같이 이미지를 수정하고 다시 저장하면 벤포드의 법칙에 맞지 않는 숫자의 패턴이 된다고 한다.(출처 : 넷플릭스 커넥티드 에피소드 수의 법칙 중)
솔직히 믿기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벤포드의 법칙이 유용하게 사용된 적도 있다.
미국의 대형 에너지 기업이었던 엔론은 1990년대 말까지 가장 혁신적인 회사로 포춘지 선정 미국 7위에 오른 기업이었다. 그러나 2001년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산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엔론은 복잡한 회계 기법을 사용하여 실제 회사의 재무 상태를 은폐했다. 미래 예상 수익을 현재 수익으로 보이게 만들고, 특수목적회사(SPE)를 설립하여 엔론의 부채를 떠넘겨 실제보다 부채 비율을 낮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밖에 투자 후 수익성이 없던 손실도 특수목적회사에 옮겨 엔론의 재무제표에서 제외시켰다.
2001년 미국 수학자 마크 니그리니는 이러한 엔론의 회계 장부에 나타난 첫 자리 수의 빈도를 조사해 보았다. 조사 결과 벤포드의 법칙에 어긋난 패턴이 보였고, 이를 통해 회계 감사팀에 보고하며 엔론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엔론의 회계장부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며, 엔론은 파산하게 된다.
예컨대 100이라는 숫자를 10% 씩 증가해 본다고 하자.
100->110->121->133-> 146->161->177->194
총 7번의 계산까지도 맨 앞자리 숫자는 1을 유지한다.
반면 900을 10% 단위로 증가시켜 보자
900->990
단 3번의 계산이면 앞자리가 1로 변한다.
같은 %로 숫자를 증가시킬 때 맨 앞자리의 숫자가 높을수록 앞자리 숫자는 빨리 바뀐다.
벤포드의 법칙은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직관적으로는 와닿지 않고, 심지어 각자의 의지대로 모인 각 도시의 인구수, 각 국가의 인구수마저도 벤포드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물론 복권 숫자와 같은 곳처럼 벤포드의 법칙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