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의지를 믿지 않는다.

by 버스 모는 이대표


1. 4,000원의 무심함


사람들은 묻는다.

매일 4,000원을 더 투자하기로 했을 때,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느냐고.


커피를 끊었는지,

담배를 줄였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아니요, 그냥 배당금이 남길래 올렸는데요."


정말 그랬다.

최근 계좌를 보니

배당금이 2~3주째 2만 원을 넘기고 있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주식 시장이 열리는 5일 동안

매일 4,000원씩 사도

내 돈은 한 푼도 안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왔다.


비장한 각오 같은 건 없었다.


집에서 쉬다가 리모컨 채널 돌리듯

툭, 설정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나에게 4,000원은,

최종 목표인 ‘매일 1만 원’으로

가는 정거장일 뿐이었고,

절반인 5,000원도 안 되는 돈이니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금융어플 AI가 축하를 건넸다.


1차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뭘 축하한다는 건지 의아해하며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4,000원 × 20일 = 80,000원.


"나의 의지가 멈춘 곳에서, 기계의 시스템이 시작되는 숫자."


아, 그렇구나.

지금 환율로 내가 모으는 주식 딱 1주 가격이구나.


그제야 기분이 묘해졌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내가 핸들을 놓아도

자본이 알아서 매달 나무 한 그루를

심어주는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었다.




2. 43년의 간극


막내딸 진주를 보고 있으면

묘한 위기감이 든다.


첫째 유주나 둘째 현주와는 또 다르다.


옹알이도 빠르고 호기심이 왕성해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얘는 성격도 급하고 궁금한 것도 많겠구나,

세상으로 나가는 속도가 남들보다 빠르겠구나 싶어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첫째 유주와는 40년.


그래, 그 정도는 요즘 세상에 흔하다 쳤다.


하지만

막내 진주가 태어나고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숫자 하나가 서늘하게 내 가슴을 찔렀다.


43년.
나는 1982년생이다.


내가 예순이 되어 은퇴를 고민하며

트럭에서 내려올 때,


2025년생인 내 막내딸 진주는 고작 열일곱, 고등학생이다.


친구 아빠들은 은퇴하고 여유를 즐길 나이에,


나는

가장 치열하게 아이의 학비를

대야 할지도 모른다.


내 몸의 엔진은 언젠가 식겠지만,

아이가 달려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성실함'만으로는 이 시간의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3. 게이머 아빠의 고백: 다캐릭 증후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투자의 고수가 될 그릇은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다캐릭 증후군’ 환자다.


게임을 해도 그렇다.

‘던전 앤 파이터’를 하면

모든 직업을 다 생성해서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고,

‘몬스터헌터’를 해도

모든 무기를 숙련되게 써야 멋있다고 느낀다.


주식도 그랬다.

한때 내 성향을 반영해 19개 종목을

백화점처럼 나열해 놓고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이든 투자든,

진짜 고수가 되려면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의지는 늘 호기심에 진다.


"이번엔 하나만 키워야지" 다짐해도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처럼

곧 다른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누른다.


사람의 의지란

가장 강력한 유지력이지만,

사실 가장 나약한 유지력이기도 하다.




4. 내가 한 발 물러선 이유


그래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못 한다.


하지만 내 아이들의 인생은

고수로 만들어주겠다.


내가 내 손가락과 의지를 못 믿기에,

나는 ‘매일 자동 매수’라는 프로그램을 켰다.


내 호기심이 딴짓을 못 하도록,

내 나약한 의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짜버린 것이다.


나는

19개 종목을 기웃거리는 즐거움에서

한 발 물러선다.


대신 그 인내의 대가로 내 아이들은

‘복리’라는 최강의 무기를 쥔 고수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내 의지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도 무심하게,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성실한 기계에게.


내 아이의 미래를 맡긴다.



디지털 인장 누끼.png 소중한 것들을 지키겠다는 오늘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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