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은 못해도 괜찮아~
국민학교(아직도 ‘초등학교’ 보다는 ‘국민학교’가 입에 남아있다.) 6학년때는 일주일 동안 학급의 이런저런 일을 하는 주번이란 가장 직급이 낮은 감투(?)가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그 감투라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앉은 세로 열에서 선생님 임의대로 주번을 정하셨는데, 그 열에서 나보다 조금 공부를 못하는 여자아이와 내가 마지막으로 남았기 때문에 은근히 주번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 엄마가 선생님을 방문하러 와서 누런 봉투를 드리고 간 후로 그 애가 주번이 되었다. 키가 어중간해서 맨 앞에 앉을 수도 맨 뒤에 앉을 수도 없었던 나는 그 흔한 줄 반장도 해보지 못했다 (어떤 선생님은 가끔 줄반장을 맨 앞줄에 있는 아이든가 맨 뒤에 앉은 아이를 시키곤 했다). 이번에는 주번이 될 거라는 기대에 대한 실망이 컸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어린 시절의 실망이다. 당시에는 실망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일도 나에게는 뭔가 시무룩한 일 중에 하나였다. 언니들과 오빠가 다니던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엄마는 나의 학교에도 오지 못하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국딩 시절이었다. 그날 저녁 오빠가 “야~ 막내! 오늘 주번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안됬냐? “ 해서 "나는 그런 거 하기 싫엇!”라고 쏘아붙였다. 그날은 유난히 밥맛이 없어서 엄마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안 먹었다.
(이미지 출처 : google)
최초의 감투라는 기회는 중학교 시절 문예부장이란 것을 할 수도 있었을~뻔~했다. 학교에서 “시화전” 이란 것을 했는데 그때 내가 제출한 시가 뽑혀서 다른 학생들의 시들과 함께 복도에 걸렸던 적이 있다. ‘문예부장’ 이란 것도 감투인가 할 수 도 있지만, 적어도 학급임원이 된다는 것이 안 되는 것보다는 기분상이라도 우쭐거릴 수 있는 일종의 감투라고 할 수 있겠다. 학급에 담당 임원(?)을 뽑는 날, 그때 문예부장을 시키자고 몇몇 애들이 나를 추천을 했는데(시 한 편 복도에 걸렸다고 문예부장시키자는 순진한 아이들이 그때는 있었다) 임원이 되지 못했다. 소위 무리 져서 따르는 친구가 많은, 교과서 책도 떠듬떠듬 읽는 부잣집 아이가 문예 부장이 되었다. “내가 무슨 임원이 되겠어? 난 안될 거야”라고 미리 마음의 방어를 쳐놓은 나는 “그럼 그렇지,,” 라며 당연한 듯 태연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라고 학교에 못 오시는 거야' 라며 임원이 안된 것에 엄마를 끌어들이는 혼자만의 심술을 부렸다. 아무튼 그날 혼자서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면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 종점까지 혼자서 걸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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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감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 장’이라는 감투를 쓴 적이 있다. 고딩 1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교련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출석부를 훑으시고 내 번호를 부르시며 일어나라고 하셨다. 급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이름을 부르시더니 “너, 아무개야~ 우향~우! 좌향~좌! 한번 해봐라”라고 하셨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앞으로~갓! 이것도 해봐” 하셨다. 그것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 왈, “너, 아무개야.. 다음 교련시간부터 소대장해라!” 하셨다. 소대장!!! “이게 뭐지? 앗! 감투닷!!”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겉으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성적이 학급에서 가장 중간점수에 있어서 나를 시킨 거라고 하셨다. 다른 반 소대장도 모두 그렇게 시켰다며… 어차피 뺑뺑이였지만 내 시험 성적이 반에서 중간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반 소대장들도 대충 성적이 중간 정도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암튼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투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중대장인지 대대장인지 진급(?)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아삼삼 하다. 그런데 그 감투라는 것이 생각처럼 신나지도, 으쓱거려지지도, 전혀 편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교련시간 때 애들 앞에서 구령을 하는 것 외에는…그리고 교련 행사 때는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행진을 해야 했던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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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나의 소위 감투에 대한 소망은 고딩 생활이 끝나면서 그 소망도 잊혀진 바람이 되었다. 그 이후로 감투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와서 먹고사는 일의 조직 운영상 리더역할을 하느라 명함 이름 앞에 찍을 수밖에 없었던 타이틀 외에는 실제로 ‘갑’ 이 될 수 있는 감투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내가 속한 아트 그룹에서 행정 부분일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일을 잘해서 (ㅋ 이건 절대적으로 내 자랑이다.) 회장의 Assistant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다. 뉴욕에서 100년이나 되는 유서 깊은 단체의 그것도 회장의 Assistant 가 되었으니 겉으로는 ‘이 나이에 굳이 그런 title 은 필요하지 않다'라고 애써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일솜씨를 인정받은 것 같아 어깨가 으쓱거려진 것은 사실이다. 비록 President는 절대(?) 아닌 Assistant 이긴 하지만. 소속된 단체를 위해 재능 기부를 하며 노력 봉사를 한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감투는 권력과 연계된 힘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갑’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말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국의 흔히 있는 non-profit 단체의 감투자리는 대부분 보수도 없는 그야 말고 노력 봉사를 해야 하는 역할이다. 보수가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갑’의 위치와는 전혀 상반되는 의미가 NON-PROFIT 단체의 감투인 것이다. 다만 NON-PROFIT 단체에서 오랫동안 감투를 쓰고 있다면 노력 봉사한 것에 대해 조금은 존경심(?)을 보여주긴 한다. 자원봉사가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신념 중에 하나처럼 여기는 미국인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갑’도 아니고 그렇다고 ‘을’은 아닌 ‘병’ 정도 되는 감투이다. 자원봉사를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이나 육체적이나 경제적이나 웬만하니까, 소위 먹고살 수 있으니까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는 별개라도 미국인들은 지역 사회를 위해 자원봉사 하는 것을 큰 의무라고 생각한다. 팔이 하나 없는 노인이 학교 앞에서 매일 아침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을 볼 때, 다운 증후군의 아줌마가 타운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책 정리를 해주는 것 볼 때, 나라에서 음식 쿠폰을 받아서 생활하는 흑인 할아버지가 노숙자들 쉼터에서 음식봉사를 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고딩들이 같은 지역에 사는 노인들의 차를 세차해 주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먹고살기 편해서 자원봉사를 한다는 생각은 절대적인 편견일 수 있다. 이번에 할 수 있는 노력 봉사 감투는 비록 ‘갑’ 질(?)을 못하는 감투이긴 하지만 이참에 봉사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서 “그런 타이틀 아니라도 일 할 수 있는데…” 하고 살짝 능청을 부리긴 했지만 '병' 정도 되는 그 감투를 받아들였다. 더욱이 내가 선호하는 아트 분야에서 봉사를 할 수 있으니 만족감도 쏠쏠 아니겠나. 그 감투 오래도록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쭈욱~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