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 사태 뒷면에 영국의 자유제국주의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1920년)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창설되었다. 전쟁 방지 및 국제 평화 달성이 목적이었다. (*)
그러나, 국제연맹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중국 만주 침략(1931년 9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년 10월) 등 국제 분쟁에 무기력하여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을 막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1945년 9월), 국제사회는 국제연맹의 실패를 교훈 삼아 1946년 4월에 국제연맹의 해체를 결정하고 새로 설립된 '국제 연합(UN, United Nations)'이 기능과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
1939년 6월, 수많은 유대인이 유럽대륙 동쪽(독일)에서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안전하게 넘어갈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 무렵 팔레스타인아랍대표단 Palestaine Arab Delegation의 자말 알후세이니 Jamal Al-Husyayni 단장은 제네바 빅토리아 호텔에 틀어박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중략)
국제연맹은 국제연맹규약 제22조에 따라 '영국'에게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문명화라는 신성한 신탁'을 수여했지만, 자말은 영국 통치에서 신뢰할 만한 점을 찾기 어려웠다. (중략)
1930년대 초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넘어 온) 유대인 정착민과 식민 당국에 대한 아랍인의 공격이 점차 늘어났다. 1933년에는 나치가 권력을 잡고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다. (중략)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많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도록 영국을 압박했다.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같은 일부 국가는 자국에서 유대인을 몰아내려 했다.
유럽 각국의 논리는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팔레스타인은 40만여 명의 (유대인) 난민으로 넘쳐났다. 단 3년 만에 유대인 이민자가 85퍼센트나 증가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대인 정착민은 아랍 농부들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을 계속해서 사들였다. (***)(중략)
1931년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이 된 직업군인 아서 워홉Arthur Wauchope은 긴급칙령을 근거로 1936년 4월 19일 팔레스타인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략)
"법은 규제된 무력에 불과하다."라는 19세기 정치사상가 제임스 스티븐의 공언은 20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팔레스타인의 현재에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지은이 '캐럴라인 엘킨스 Caroline Elkins', 옮긴이 '김현정', <폭력의 유산 Legacy of Violence>, 상상스퀘어(2025), Page 292-305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탁통치 (1920년 4월~1948년 5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국제 외교 무대에서 자행된 '영국의 이중 플레이'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태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우선, 후세인-맥마흔 서한(Hussein-McMahon Correspondence)이 있다. 1915년~1916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한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과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가 교환한 편지이다.
이 문서의 핵심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에 맞서 아랍이 봉기할 경우,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insula), 시리아(Syria),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등의 광범위한 지역에 아랍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이 지지한다는 약속이었다. (****)
그러나, 이 독립 약속 범위에 팔레스타인(Palestine) 지역이 명확히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모호성 때문에, 이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함께 영국의 이중 외교 논란을 낳았다.
2025년 현재에도 진행 중인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와 가자지구(Gaza Strip)를 포함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한 통의 편지가 더 있다.
영국의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외무장관이 1917년 발표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팔레스타인(Palestine)에 유대인(Jews)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며 이주를 촉진했다.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영국 현지 거주 유대인들의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에게 편지를 보냈다. (*****)
팔레스타인(Palestine)에 유대인(Jews)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설립을 영국 정부가 지지함을 공식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 온 유대인 이주가 늘면서, 기존 팔레스타인 아랍인(Palestinian Arabs)들과의 영토 및 종교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갈등은 2차 세계대전 후에 영국이 식민지배에서 물러난 후 (책임있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UN에 책임을 넘기는 바람에) 1948년 이스라엘(Israel)이 건국되고 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와 가자지구(Gaza Strip)를 포함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적반하장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특정 지역으로 몰아내려는 움직임까지 진행 중이다.
난민 신세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잠시 기거하라고 방 한 칸을 내주었더니, 시간이 지나니 집까지 통째로 점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집주인을 어디론가 내쫓는 형세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영국의 공영방송이라는 BBC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조금이라도 공격하면 텔 아비브(Tel Aviv-Yafo)에서 헬멧을 쓴 채로 상세히 보도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가자 Gaza 지역이 공격을 당하면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가자 지구가 멀리 보이는 곳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취재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시행되는 의료와 식량 지원 이 외에, 국가 간 외교 관계에서 취해지는 모든 행동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고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 임진왜란 발생 이전까지 한 발 앞선 한국의 문물을 전달받고 지원을 받았던 일본이 거의 비슷한 시기(1910-1945)에 한국을 식민지로 억압했던 역사가 떠 오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References>
Title Background Image: Emblems of United Nations(Image by Miguel Á. Padriñán, Pixabay)
(*) 국가기록원, 유엔 창설 이전 국제기구의 발전: "유엔의 창설과 발전은 근대 국제사회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 서울경제, [역사 속 하루] 국제연맹의 퇴장 관련 기사: "1946년 4월 18일에 열린 제21차 총회에서 국제연맹은 해체를 선언하고 모든 자산을 새로 탄생한 국제연합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 영국의 시온(Zion)주의와 나치와의 협정 덕분에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소유한 재산을 가지고 망명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들은 대대로 물려온 땅을 자본을 소유한 유대인들에게 잃고, 소작농이 되었기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유대인들의 횡포와 영국인들의 잔인한 무력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1936년 4월-10월까지 1차 팔레스타인 아랍봉기가 발생했다 (노바티오 해설)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Wikipedia.org
(****)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오늘날의 튀르키예(Türkiye) 공화국의 전신이다. 한국에서는 '터키'라는 나라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노바티오 해설)
(*****) 월터 로스차일드는 1대 로스 차일드 남작이었던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의 장남이자 상속자이다. 금융업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유대인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정착촌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은밀히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