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유산 Caroline Elkins(최종)

과거 제국주의 폭력, 2025년 관세폭탄으로 환생

by 노바티오Novatio
2018년 5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Meghan Marklc의 결혼은 오랫동안 영국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의 정체성에 매몰된 왕실에 탈인종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여겨졌다. (중략)

2021년 초, 오프라 윈프리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아들 아치가 태어나기도 전에 피부색에 대해 질문하던 왕실의 행태 등 고통스러운 인종차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략)

2016년 브렉시트 투표로 영국의 독자적인 행보를 선호한 보수당은 신화화된 영국의 과거를 강조하고 영국만의 가치와 영광, 정체성을 훼손하는 세력을 표적으로 삼아 승리했다.

브렉시트 투표가 진행되었을 때 보수당은 '통제권'을 되찾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중략)

홀로 우뚝 서라는 요구, 인종•민족• 종교 다수 집단에 특혜를 주라는 요구,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는 요구 등 비밀 메시지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 지은이 '캐럴라인 엘킨스 Caroline Elkins', 옮긴이 '김현정', <폭력의 유산 Legacy of Violence>, 상상스퀘어(2025), Page 969-973
<폭력의 유산 Legacy of Violence> 원문 서적과 번역서 책 표지 (Image: 인터넷 서점 Aladdin 화면 갈무리)

혼혈 여성이 영국 왕실에 신부로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수백 년간 백인 중심주의에 갇혀 있던 왕실이 마침내 변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피부색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보편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다문화,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꿈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2년도 걸리지 않았다. 왕실 내부의 인종차별을 폭로하며 미국으로 떠난 부부의 모습은, 진보의 환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보여주었다.


흥미롭게도, 진보의 환상이 무너진 영국은 곧바로 또 다른 환상으로 향했다. 2016년 브렉시트는 "통제권을 되찾자"는 슬로건 아래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 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먼저 나서서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정서적 민족주의에 국민들의 참여를 동참하자고 선동하며 국가의 운명을 건 것이다.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에 관한 여론조사 추이. 2015년까지도 유럽 연합 잔류가 우세였다. (Source: Wikipedia)

국민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은 케머런 총리는 국민투표 결과 찬성 52% 대 반대 48%로 브렉시트가 결정되자, 국민투표 직후인 2016년 7월 총리직에서 무책임하게 사퇴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그 역시 "국민들이 설마 내가 한 번 해본 말에 진심으로 찬성하겠어?" 하는 생각에서 브렉시트를 외쳤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두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두 환상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둘 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내러티브로 치환하고, 그 이야기가 실현될 것이라 믿는다.


메건 마클 한 사람의 등장으로 수백 년 인종차별 구조가 해체될 리 없듯이, 브렉시트 하나로 잃어버린 제국의 영광이 돌아올 리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상을 원한다.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이야기가 주는 위안이 크기 때문이다.


브랙시트의 시발점은 유럽연합의 이민정책에 반대하고자 했던 영국이 스스로 이민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하며, 그러려면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선동적인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유권자들은 유럽연합 탈퇴 후에 영국과 영국인의 삶에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다.




현재 미국이 각국에 요구하는 관세 협상은 영국 브렉시트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관세를 무기로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고 제조업을 되살리겠다는 약속이다.


마치 영국이 영연방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것처럼, 미국은 관세를 경제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위대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이다.


영국이 영연방 국가들이 자동으로 특혜를 줄 것이라 오판했듯, 미국도 동맹국들과 다양한 국가들이 압박에 굴복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캐나다도, 멕시코도, 유럽도, 그리고 동맹국가라고 하는 한국 또한 자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주권국가들이다.

무역관세가 지속되었을 경우, 미국의 어느 주(State)가 고통받는 지를 달러로 환산한 그래픽 자료 (Source: Howmuch.net)

각 국가들은 보복관세로 맞받아치고, 공급망을 재편하며, 미국 이외에 새로운 무역 파트너를 찾는다. 관세로 인한 비용은 결국 미국 소비자와 기업이 떠안는다. 제조업이 돌아오기는커녕 미국 현지 물가는 오르고 수출은 줄어든다.


경제학자들이 "경제적 경험주의가 아닌 정서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이, 분석이 아니라 향수가 정책을 결정할 때,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환상의 붕괴로 이어진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경제 성장률 하락, 무역 감소, 물가 상승을 겪었다. 영연방은 EU 단일시장을 대체하지 못했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환상을 팔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는가? 환상은 즉각적인 정서적 만족을 준다. "우리는 특별하다", "우리는 통제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위대해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달래준다.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외부의 적 탓으로 돌릴 수 있게 해 준다. EU가 문제였고, 이민자가 문제였고, 불공정 무역이 문제였다는 단순한 서사는 이해하기 쉽고 분노를 표출할 대상(표적)을 제공한다.


하지만 환상의 경제학은 반드시 실패한다. 경제는 감정이 아니라 숫자로 움직이고, 국제관계는 향수가 아니라 이익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메건 마클 한 사람이 왕실의 인종차별을 끝낼 수 없었듯, 브렉시트 하나로 영국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듯, 관세 하나로 미국이 1950년대의 제조업 강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환상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현실은 언제나 복잡하다. 그러나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 경제 지표는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정책의 결과는 즉각 나타난다. 환상의 유통기한이 끝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 환상이 또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환상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성찰하기보다 새로운 환상을 찾는다.


진정한 변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복잡한 문제에는 복잡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지난한 협상과 타협이 실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환상의 경제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국의 사례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한국도 지난 3년 동안 대중의 '환상' 속에 등장한 검증받지 않은 인물을 선택하는 바람에 침몰하며 위의 영국. 미국과 같은 궤적을 추종하며 절벽 끝까지 갔었다.


다행스럽게도,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선결제로 연대하면서 폭설이 내리는 도로에서 은박지를 뒤집어쓴 채 평화롭게, 그러나 단호하며 집요하게 저항한 슬기롭고 용기 있는 국민들 덕분에 '환상'에서 깨어나 빠르게 회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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