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A. H.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 5단계 이론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들었다.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욕구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주변에서 반대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 것인가. 스스로 옳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그 상황을 돌파하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돌파하고 지속적으로 전진하기 위해 익숙한 자리를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이 있다. 바로 김소연의 『명혜』(창비,2007)의 명혜이다. 1916년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14세 명혜는 여성의 교육보다는 ‘얌전히 살림 배우다가 정해 주는 대로 시집’을 가라고 하는 아버지 송 참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부를 하러 수원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간다. 유학을 떠날 때는 단지 허겁지겁 시집을 가는 것이 싫고 새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명혜의 자아 찾기의 시작이 된다.
명혜는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아기’라는 아명을 버리고 ‘명혜’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름은 특정한 대상을 다른 이와 분명히 구별하여 주는 것으로써 자신에 대한 존재 인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처음 제시된 명혜의 이름 찾기는 이야기 전반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비록 사촌 오빠인 명규의 도움이 컸지만 이름을 얻은 명혜는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명혜는 허겁지겁 호적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기(兒怾)라는 글자 위로 검은 줄이 죽 그어져 있고 바로 아래 명혜(明慧)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마치 ‘아기’라는 이름은 죽고 ‘명혜’라는 이름이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밝을 명(明), 슬기로울 혜(慧).’
수십 번 되뇌어도 가슴이 뛰는 두 글자였다. (p40)
명혜가 그랬듯이 나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나는 수업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면서 “너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써 봐.”라고 하면 이름이 뭐가 자랑스럽냐고 물어 본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왜 자꾸 쓰라고 하냐며 별명이나 성 씨만 달랑 적어 놓는 아이도 있다. 이름이 부끄러운지 다른 글자보다 유독 작게 쓰는 아이도 보곤 한다. 그러나 이름은 ‘나는 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自), 나 아(我)’ 곧 ‘자아’라는 용어는 심리학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뜻하는데 곧 이름은 각각의 개별된 자아의 모습의 표상이니 얼마나 중요한가.
이름을 얻은 명혜는 익숙한 자리를 떠난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자신의 편안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편안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데 명혜의 떠남은 두려움 보다는 설렘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낯선 곳에 던져져서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이어가야 하는 명혜에게 백낙경이라는 지지자가 나타나는데, 낙경은 명혜와 경의 여학교를 같이 다니게 될 동갑내기 친구이다. 낙경은 명혜와는 달리 ‘일생의 꿈’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는 것인데 이러한 낙경은 명혜에게 촉진제가 되어 주는 친구가 된다.
명혜는 ‘일생의 꿈’이라는 말에 속이 뜨끔했다. 앞날에 대해서는 여학교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리라던 자신과는 사뭇 다른 낙경이 대단해 보였다.
…(중략)…
“내 고민이 바로 그거야. 너처럼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 무엇을 하고 싶다 하고 당당히 말해 봤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 오라버니는 학교 다니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된다고 하셨지만……” (p97)
이러한 명혜에게도 낙경처럼 ‘일생의 꿈’을 찾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통역을 하는 일이었다. 특히 병원에서 홀로 찬 바닥에 누워 있는 아픈 아이를 발견하여 업게 되는 장면은 명혜에게 있어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더불어 신 데레사 선생님의 수술을 돕게 되고, 수술 후 나오는 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명혜는 의사의 길을 생각한다. 이때 이미 명혜가 의사로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 챈 신 선생님의 잘 생각해 보라는 격려의 말은 명혜 마음에 불을 당긴다.
‘아, 나도 저렇게 치료해 봤으면……’
수술 시중을 드는 내내, 명혜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p127)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로구나.’ (p129)
또한, 일본군 총에 맞은 명규가 생과 사의 기로에 놓여 있으면서도 의사가 되라고 명혜에게 당부하는 장면은 명혜가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면서도 의사가 꼭 되어 돌아오리라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여자니 남자니, 그런 건 상관하지 말고 네가 이루고 싶은 꿈을 꼭 이루란 말이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꼭 훌륭한 의사가 되어라. 아픈 동포 돌보는 일도 독립운동 못지않은 큰일일 테니……” (p173)
좋은 의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명혜의 다짐은 우리에게 환경이나 처지에 매이지 말고 당차게 자신의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함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포기해야 할 것들이다. 명혜가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익숙한 집을 떠났듯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머물러 있기 보다는 흘러가는 삶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해 더 잘 인지하게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여 더 나은 자신의 모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은 중요하다. 교육은 자아의 깨우침을 의미한다. 학습을 통해 지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치한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내야 하는지 자신을 인지하는 데에 강력한 도구가 되며 어떤 상황 속에서는 무기가 되어 줄 수 있다.
또한 필요한 것은 지지자이다. 명혜와 친구 낙경이처럼 우리 아이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꿈을 향한 촉진제가 되어 주는 친구가 되길 바라본다. 자신의 꿈을 향해 가는데 손을 잡아 주고 응원해 주는 동역자야 말로 자신의 평생의 사람을 얻는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명혜』는 이름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떠남을 통해 낯선 곳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했다. 또한 낯선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끝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더 큰 희망을 품게 되어 다시 떠나는 구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자신으로 무장되기 위해 익숙한 영역을 떠난 명혜가 분명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다시 돌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해본다. 당당하게 사회 속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꿈이 아닌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말이다.